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 위키미디어 코먼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인간공학에 대하여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문순표 옮김/오월의봄·3만8000원
페터 슬로터다이크(73)는 1983년 <냉소적 이성 비판> 출간으로 유명해진 독일 철학자다. 그 책에서 슬로터다이크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비판이론이 젖줄을 댄 계몽주의가 1960년대 학생운동의 해체 이후 냉소주의로 변질했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비판 모델로 냉소주의의 원형인 고대 견유학파를 내세웠다. ‘거리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아테네 법질서에 도발을 감행했던 대로 부정과 거부의 야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도권 철학에 대한 이런 반항적 태도는 슬로터다이크가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 ‘자유저술가’라고 부르는 데서도 드러난다. 어떤 면에서 이 철학자는 비슷한 연배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를 연상시킨다. 지제크처럼 슬로터다이크도 재기발랄하고 까다로우면서도 생기 넘치는 상상력으로 온갖 방면으로 사유를 펼쳐낸다. 1년에 책을 두 권씩 낸다는 점에서도 다산성의 저술가 지제크를 떠올리게 한다.
2009년에 출간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인간공학에 대하여>에서도 낯설고 기이한 슬로터다이크 철학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계종교의 역사를 독특한 시각에서 살펴 들어가 거기서 뽑아낸 ‘자기수련’(Askese)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조망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7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철학서의 핵심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책의 제목으로 쓰인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문장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 문장은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만난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 곧 ‘머리와 사지가 없고 몸통만 있는 조각상’을 보고 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한다. 이 조각상이 시인에게 ‘네 삶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삶을 바꾸라니 도대체 어떻게 바꾸란 말인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의 부제 ‘인간공학에 대하여’에 나오는 인간공학(Anthropotechntik)이라는 말이 알려준다. 인간공학은 슬로터다이크가 다른 책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사용한 뒤로 널리 알려진 말인데, 그 내용을 보면 ‘공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오히려 말뜻을 알려면 공학으로 번역된 테크니크(Technik)의 어원을 살피는 것이 낫다. 뿌리를 더듬어보면 이 말은 기예 또는 기예를 다루는 능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공학이란 ‘인간이 기예를 통해 자기 자신을 개조하는 것’을 뜻하며, 이 책에 등장하는 쓰임새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행하는 자기수련’을 뜻한다. 자기수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인간공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네 삶을 자기수련이라는 방식을 통해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상태로 바꾸라’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을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의 패러디로 시작한다. “종교라는 유령이 세계 주변을 떠돌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점점 힘을 잃어온 종교가 소멸의 벼랑 끝에서 다시금 귀환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종교의 귀환을 종교 자체의 귀환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은이가 보기에 애초부터 종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온 것은 종교라는 외피를 쓴 ‘자기수련’, 다른 말로 하면 ‘수행’(修行)이다. 일신교가 탄생한 이래 고래로부터 종교라는 것의 핵심은 자기수련 또는 수행이었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확고한 전제다.
더 주목할 것은 인간을 ‘호모 이무놀로기쿠스’(homo immunologicus), 곧 ‘면역학적 존재’로 보는 지은이의 독특한 인간 규정이다. 19세기 생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 환경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면역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은이는 생물학적 면역체라는 인간 규정을 사회와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사회적 면역체로, 나아가 정신적 면역체로 이해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고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 인간이라는 얘기다. 법률로 이웃의 가해자를 제지하고 연대로 외부의 침략자에 대항하는 것이다. 가장 고차적인 면역은 정신의 영역에서 나타났다. 죽음이라는 궁극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 죽음을 다스리는 종교적 체계, 지은이의 표현으로는 자기수련의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세 번째 정신적 면역체계에 관심을 집중해 기독교·불교·힌두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모든 주요 종교의 초기 형태를 탐사하며 그 실천 양상을 검토한다. 이런 검토 끝에 찾아내는 것이 ‘자기수련을 통한 자기극복의 의지’다. 지은이는 이 자기극복의 의지가 오늘날 온갖 영역의 활동과 훈련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요즘 유행하는 ‘자기계발’의 역사를 살피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의 강조점은 ‘전 지구적 차원의 위기에 대한 자기수련적 공동대응’에 놓여 있다. 여기서 자기수련으로 번역된 아스케제(Askese)에는 ‘고행·금욕’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온난화라는 전 지구적 차원의 재앙에 맞서려면 자본주의적 과잉생산·과잉소비로부터 후퇴하는 일종의 금욕적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은이는 지구 온난화라는 미증유의 위험에 맞선 전 지구적 차원의 공-면역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요컨대 ‘공-면역주의(co-immunism) 선언’이 이 책의 결론인 셈이다. 이 공-면역주의 곧 코-이뮤니즘라는 말에서 공산주의 곧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말이 울려 나온다. 말하자면 코-이뮤니즘이란 코뮤니즘의 새로운 판본이다. 코뮤니즘이 “보편적인 협력의 자기수련 지평”에서만 실현될 수 있듯이, 온난화라는 재앙에서 인류를 구해 내려면 공-면역주의라는 자기수련의 공동 질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을 ‘면역학적 존재’라고 칭하고, 모든 역사를 ‘면역체계의 투쟁사’고 부르는 지은이는 지구가 인류를 향해 ‘공-면역 체계 구축을 위해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절대명령을 내린다고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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