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책거리
낮은 포복을 전개해 온 바이러스의 침공이, 백병전으로 본격화하는 모양입니다. 방심의 작은 틈새는 이제 커다란 구멍으로 커졌습니다.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포와 불안이 확산합니다. 불만과 변명은 백신 개발이 불가능한 고질이기도 합니다. 드높았던 찬양은 어느새 저주로 변질되어 갑니다.
숙주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이 마련해둔 사유의 광장으로 탈주할 시간입니다. 고독한 일입니다. 가상과 일상의 경계를 오가는 일은, 긴 낮잠에서 깨어난 뒤 안개 속에 홀로 버려진 듯 찾아오는 외로움을 유발합니다. 홀로됨 이후에는 환희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앎의 기쁨, 성찰의 희열, 탐미의 쾌감이 불현듯 찾아듭니다. 불시의 일격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죽비가 언제 뒤통수를 노릴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흰 게 옳다고 외치고, 또 다른 이는 검은 것이 바르다고 고집합니다. 극단에 이른 큰 목소리들이 양쪽에서 거대한 대열을 짜고, 또다른 백병전을 벌입니다. 그러나 숱한 책들의 역사는 증언합니다. 단순명확 자체가 진실인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온전히 검은 것도 순백의 완벽함도 이데아의 세계에나 존재합니다. 흑도 백도 일말의 진실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흑백의 우격다짐 속에서 회색인은 갈 길을 잃고 고뇌와 고통은 더욱 커지겠지만 그 길에 진실이 감춰져 있다면 용기있게 낮은 목소리를 읊조리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다. 찬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바이러스는 더 자주 이길 것입니다. 흑백의 강고한 대치 앞에서 회색인의 번민은 더욱 가장자리로 내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헤매는 고된 길, 주어진 정답을 거부하여 박해받는 길이, 회색인의 거리두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고요히 침잠하여 생각에 잠길 시간입니다.
김진철 책지성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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