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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무서우니까…” 그의 업무일지엔 불안이 빼곡했다

등록 2020-12-11 04:59수정 2020-12-11 13:28

현장실습생, 산업기능요원으로 공장서 일했던 3년7개월 기록
“죽어야만 알려지는 청년노동, 살아 있는 목소리 들려주고파”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허태준 지음/호밀밭·1만4000원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연말을 맞은 거리에 덕담이 나부꼈다. 한 해 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이제는 좀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프랜차이즈 빵집이, 미용실이, 이동통신사가 줄지어 등을 토닥였다. 그 속에서 열아홉 허태준은 물었다.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나는, 수고하지 않았던 걸까.’ 그에게도 쉽지 않은 한 해였다. 그해 가을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처음으로 한 공장에 입사했다. “조명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와 심장을 죄는 기계음. (…) 학창 시절의 부드러운 여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카롭고 뜨거운 것, 자칫 나를 상처 입힐 것만 같은 낯선 형상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위협적인 기계 앞에서 수도 없이 마른침만 삼키며 보낸 넉 달이었지만 이 거리에선 누구도 그 시간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날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연거푸 술잔을 부딪쳤고, 몇 시간 뒤 지하철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다’는 말이 우리를 소외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학교 운동장을 공장 레일이 감싸고 있다. 그 주위엔 책가방과 안전화, 안전 라바콘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지은이가 겪은, 학생도 사회인도 아니었던 경계인의 시간을 형상화했다. 호밀밭 제공
학교 운동장을 공장 레일이 감싸고 있다. 그 주위엔 책가방과 안전화, 안전 라바콘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지은이가 겪은, 학생도 사회인도 아니었던 경계인의 시간을 형상화했다. 호밀밭 제공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는 대학 대신 일터를 택한 청년노동자가 3년7개월 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겪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이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예고’ 대신 ‘공고’(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지은이 허태준은 부산의 한 공장에서 현장실습생·산업기능요원(병무청이 지정한 기업에서 군복무를 대신한다)으로 일하며 교복을 채 벗을 새도 없이 허겁지겁 작업복을 덧입어야 했던 당황스럽고, 서글프며, 불안했던 시간들을 털어놓는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 소설이나 만화에서도 이십 대는 다 대학생이었고, 직장인은 모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나 전해지는 동화 같았다. (…)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김군,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기계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노동자의 존재는 누군가 죽어야만 간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들의 존재를 더 오래 붙잡기 위해서는 죽음에 의해 “박제”되지 않은 “살아 있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가 내밀한 속마음을 세상에 꺼내놓은 이유다.

교복 셔츠 위에 작업복을 껴입은 지은이 허태준의 고교 시절. 출판사 제공
교복 셔츠 위에 작업복을 껴입은 지은이 허태준의 고교 시절. 출판사 제공

그렇게 공개된 속마음에는 불안이 뺵빽이 적혀 있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공무팀’에 배정된 지은이. 팀의 유일한 상사는 너무 바빠 차근차근 가르쳐 줄 시간이 없고, 홀로 남은 그는 “주위에 흩어진 말들을 주워 모아 하나씩 수첩에 옮겨 적”는다. 그렇게 완성한 업무일지가 작업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쌓였는데, 그에겐 뿌듯함이 아니라 서글픔이 밀려온다. “뭘 이렇게 열심히 썼을까. 이만큼 쓸 때까지, 나는 계속 불안했던 걸까. (…) 무서우니까. 의지할 곳조차 마땅치 않기에 자꾸만 돌아보고 되묻게 되는 것이다. (…) 낡은 종이는 누군가의 불안을 짊어지기엔 너무 쉽게 찢어질 것만 같았다.” 체계적인 직업교육이 사라진 자리, 절박한 기록만이 불안을 잠재운다.

업무일지에 안전을 의탁한 노동환경. 청년에겐 안전 ‘강박증’이 생긴다. 후배가 만든 이동대차가 길이 6m짜리 황동을 실을 만큼 튼튼한지 쇠망치로 재차 확인해 볼 정도다. 그러나 단 세 번의 망치질에 바퀴는 떨어져 나가고, 지은이는 후배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저기 쌓여 있는 원자재들이 얼마나 무거운 줄 알아? 만약에 그대로 쓰다가 바퀴가 떨어졌으면? 넌 지금 실수 하나 한 게 아니라, 네 친구랑 선배들 전부 위험하게 한 거야!” 퇴근 시간을 잊을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던 일을 회상하며 그는 적는다. “책임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한 번 더 확인해보는 일에 있었다. (…) 멈춘 기계의 맞은편, 업무의 뒤편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후배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말이 원청 기업 간부나 현장 작업관리자의 입이 아니라 기껏해야 갓 스무살 넘은 청년의 입에서 나온다는 데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산재 사망률의 원인이 있지 않을까.

지은이가 불안을 잊기 위해 작성한 업무노트. 출판사 제공
지은이가 불안을 잊기 위해 작성한 업무노트. 출판사 제공

첫 사회생활인데다 이직·퇴사도 자유롭지 않은 현장실습생과 산업기능요원에게는 상사의 폭력과 폭언도 사고만큼이나 위협이 된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병무청에서 실태조사를 하지만 답할 시간을 단 몇 초도 주지 않는 무성의한 질문에 진실을 꺼내놓는 사람은 없다. “‘회사에서 폭행이나 폭언이 있었나요? 네, 없는 거로 할게요.’ 아주 짧은 순간, 그 침묵 사이로 얼마나 많은 눈빛이 오고 갔는지 모두가 알았다. 우리의 표현이 암묵적인 동의라는 것도, 그가 의도적으로 그걸 무시했다는 것도.” 잔업이 200시간을 넘어도, 술 취한 상사에게 이유 없이 멱살을 잡혀도 이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허태준 작가가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숨진 김용균 2주기를 추모하며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차별받지 않게”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허태준 제공.
허태준 작가가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숨진 김용균 2주기를 추모하며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차별받지 않게”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허태준 제공.

‘갭이어’(Gap year·진로탐색기간)를 갖기는커녕 고등학교와 ‘오버랩’(겹치기)해 들어간 공장. 지은이는 어린 나이에 내린 선택이 인생의 많은 선택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판단으로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천천히, 껴입었던 작업복과 교복을 벗으며 그가 겪은 차별과 위험과 폭력을 응시한다. 지은이의 시선은 이제 공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혹 행위로 세상을 떠난 고(故) 최숙현 선수, 회사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코로나19에 걸린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에까지 가닿는다. “시간이라는 간격을 두고, 우리는 ‘진짜’ 서로가 될 수 있다. (…) 끊임없이 서로를 구분 짓고 경계하기보다는 유사한 형태의 폭력과 상처를 보듬어나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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