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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표제는 ‘진짜 민주주의의 유사품’ 아니다”

등록 2020-12-04 05:00수정 2020-12-04 10:08

정치학자 비에이라·런시먼, 대표제의 역사·논리 통해 대안 정치 가능성 제기
대표제 개념 확장해, 자기 뜻 밝힐 수 없는 지구·동식물·미래세대 대표 가능

대표: 역사, 논리, 정치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노시내 옮김/후마니타스·1만7000원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체로, 유권자가 선거로 대표를 뽑는 ‘대표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나 대표제 민주주의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열등한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할 여건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대표제 민주주의는 열등한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일까. <대표: 역사, 논리, 정치>는 이런 통념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책을 함께 쓴 정치학자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영국 요크대 교수)와 데이비드 런시먼(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은 대표제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의 아류나 유사품으로 보는 시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대표제 민주주의의 특징과 장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표제 민주주의라는 말에 담긴 ‘대표’라는 제도의 고유한 성격이 이 책이 주목하는 대상이다.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

‘대표’라는 개념의 영어 낱말은 레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다. 그런데 이 말은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다. 레프리젠테이션은 마음속 생각을 말로 드러낼 때는 ‘표상’으로 번역되고, 사물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낼 때는 ‘재현’으로 번역된다. 연극에서 인물을 연기하는 것도 레프리젠테이션이며, 변호사가 소송을 대리하는 것도 레프리젠테이션이다. 특히 근대 정치에서 이 단어는 유권자를 대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책은 레프리젠테이션이라는 말의 이런 다양한 뜻을 염두에 두면서 이 말의 정치적 함의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제1부에서는 이 말의 역사적 전개를 살피고, 제2부에서는 이 말의 의미를 분석적으로 탐사하며 제3부에서는 대표라는 개념이 지닌 현재적·미래적 의미를 짚는다. 특히 제1부의 역사적 탐사는 대표 개념이 진화해온 과정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어 책의 백미를 이룬다.

대표제의 정치적 함의와 관련해 이 책이 가장 주목하는 인물은 17세기 영국 내전과 청교도혁명이 낳은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다. 홉스야말로 ‘대표’의 정치적 함의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철학자라고 이 책은 말한다. 홉스의 주장은 ‘국가란 대표 행위를 통해, 대표 행위와 함께 탄생한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자연상태에 있는 개인들은 그저 군중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인 상태’에 있다고 간주했다. 이 자연상태를 끝내려면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맺고 자신들의 모든 권한을 단일한 대표자에게 위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주권권력이다. 이렇게 주권권력이 탄생할 때 개인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던 군중 곧 다중이 정치적 통일체로서 ‘인민’이 된다. 주권자의 탄생과 함께 인민도 탄생하는 것이다. 이 인민이 바로 ‘리바이어던’ 곧 국가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주장을 한다. ‘흩어진 개인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사회계약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다중의 총의로 주권적 대표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가상이고 허구다.’ 홉스의 논리는 이렇게 허구 위에서 대표자가 탄생해 주권을 행사한다는 주장을 내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표자가 인민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대표자는 인민의 뜻과는 무관한 자의적 통치자가 될 수도 있고, 인민의 직접적 간섭을 받지 않은 채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더 높은 차원의 통치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홉스의 대표론은 반동적인 방향과 진보적인 방향을 모두 가리키고 있다.

데이비드 런시먼. 위키미디어 코먼스
데이비드 런시먼. 위키미디어 코먼스

홉스의 ‘대표’ 사상은 100년 뒤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를 만난다.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다. 루소는 홉스가 상정한 ‘대표’ 개념을 거부했다. 대표자를 선출함과 동시에 인민은 자유를 잃고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었다. 대표제와 민주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 루소는 1767년 미라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엄격한 민주주의와 가장 완전한 홉스주의 사이에 절충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홉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인민은 대표돼야만 비로소 의지를 지닐 수 었었다. 그러나 루소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대표하게 하는 인민은 인민이 아니었다.” 홉스와 루소의 차이를 메우려고 한 사람이 프랑스혁명 시기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쓴 시에예스였다고 이 책은 말한다. 시에예스는 홉스를 따라 대표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루소를 따라 국민의 정치적 의지만이 대표에 정당성을 준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국민이 행동하려면 대표자가 필요하고, 대표자가 행동할 권한을 누리려면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여기서 대표제와 민주주의가 하나로 연결되는 ‘대표제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시에예스의 생각은 비슷한 시기에 독립혁명을 일으킨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의 생각으로 이어졌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대표제 민주주의는 점차로 확고한 것이 됐고 민주주의의 표준 모델로 정착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강조하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대표제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이 역사를 통해 살필 수 있는 ‘대표제’의 정치적 기능이다. 분명한 것은 대표제는 민주주의와 성격이 아주 다른 제도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그 본질상 다수의 의지와 필연적으로 결부돼 있다. 다시 말해 다수의 의지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홉스의 논리가 암시하는 대로 대표제는 다수의 의지로부터 떨어져서 대표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나아가 스스로 의지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것도 대표제에서는 가능하다. 그런 차원의 대표제가 적용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책은 환경생태 문제와 미래세대 문제를 든다. 지구를 대표해 온난화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는 것,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대표해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를 대표해 지금 세대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표의 의미를 이렇게 확장함으로써 대표제를 통해 민주주의 원리가 구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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