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본 게 열 살 때였습니다. 저는 당진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주요 근거지였던 아산에서 항일 운동과 사회 운동을 하셨기 때문이었죠. 아버님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1932년과 1935년에 각각 1년형과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셨습니다. 그동안은 연좌제의 굴레가 무서워 포상 신청을 하지 못하다가 이제라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인 이근배(사진) 시인이 27일 낮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서 이색적인 기자간담회를 마련했다. 바로 전날인 26일 그의 부친인 이선준(1911~1966) 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것이다. 이선준 선생은 1932년 충남 아산에서 일본 ‘천황’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려 회람시키고, 아산적색농민조합이라는 지하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고교생들에게 민족주의와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격문을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근배 시인은 이날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 신문 기사 복사본 등 자료를 기자들에게 나눠 주며 부친의 항일 활동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또 가족사를 담은 자신의 시 ‘자화상’을 낭송하며 설명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 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 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 있다”(‘자화상’ 부분)
이근배 시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4년 만에 포상을 받게 되어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감회가 생긴다”며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한국문학 고유의 디엔에이(DNA)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남북 분단과 이념 대립이 지속되는 한 한국 문학은 반신불수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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