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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갈아엎은 밭고랑처럼 살고 싶었건만…

등록 2020-11-13 04:59수정 2020-11-13 10:53

죽음에 대하여

유용주 지음/도서출판b·1만4000원

유용주(사진)는 1991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뒤 몇 권의 시집을 펴냈고, 2000년에는 <실천문학>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소설 겸업을 선언했다. 그 뒤 그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마린을 찾아서>와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 두 자전적 장편소설을 선보였다. 그가 소설 등단 뒤 20년 만에 묶어 낸 첫 번째 소설집 <죽음에 대하여>에는 등단작 ‘고주망태와 푸대자루’를 비롯해 여덟 단편이 실렸다.

‘고주망태와 푸대자루’는 작중에서 각각 고주망태와 푸대자루로 일컬어지는 술꾼 친구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이다. 대화라고는 했지만, 유용주 자신을 모델로 삼은 고주망태가 자신이 살아 온 내력과 가족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주를 이루고 푸대자루는 그의 말을 끌어내기 위한 추임새를 보태는 정도다.

고주망태의 가족 이야기는 얼마 전 부산 큰형을 보고 온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젊은 시절 부산 서면 시장에서 완장을 차고 다니며 건달 노릇을 했던 큰형은 저수지 공사 십장 시절 인근 동네 젊은 처자를 반강제로 아내로 삼았다. 결혼 뒤 서해안에 생긴 철강 회사에서 러시아 대형 선박 해체 작업을 하며 큰 돈을 벌었지만, 술과 도박으로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결국 노년에 풍을 맞아 누운 남편을 대신해 형수가 모진 고생을 하다가 암에 걸려 먼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

“이래봬도 봄날, 갈아엎은 밭고랑처럼 살고 싶었다. 여름에는 깎아놓은 논두렁처럼 살고 싶었다. 강둑에 미루나무 잎 눈부시게 반짝이고, 매미소리 햇살을 잘게 썰어대는, 달구지 지나가는 황톳길 되고 싶었다, 이 화상아.”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가락과 전원 취향은 유용주의 출발이 시였음을 새삼 알게 한다. “틈으로 보나 열고 보나 매일반” “지네가 관절염 앓는 소리” 같은 해학적 표현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누구 말대로 내 몸이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지쳤다. 그만 눕고 싶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가만 있거라, 어디 보자.”

유용주가 사숙했던 선배 소설가 이문구의 소설집 제목이 소환된 마지막 대목은 등단작에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들을 예고한다. 소식이 끊긴 작은형 이야기인 ‘검정 구두’, 큰누나와 어머니 이야기인 ‘불’, 큰형 이야기 ‘호줏기’ 그리고 장인 장모와 처가 식구들 이야기인 ‘황산벌’ 등 이 책에 함께 실린 작품들을 함께 읽으면 작가 유용주의 신산한 개인사와 곡절 깊은 한국 현대사가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도서출판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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