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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흑인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록 2020-11-06 04:59수정 2020-11-06 10:05

영미 흑인 소설 ‘워터 댄서’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번역출간
워터 댄서
타네히시 코츠 지음, 강동혁 옮김/다산책방·1만7000원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비채·1만7800원

미국과 영국 흑인 문학의 현재를 대표하는 두 소설이 나란히 번역 출간되었다. 흑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논픽션 <세상과 나 사이>로 2015년 전미도서상을 받은 타네히시 코츠(45)의 첫 소설 <워터 댄서>는 지난해에 나와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화제작이다. 토니 모리슨, 록산 게이, 버락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등의 극찬을 받았다. 백인 영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버나딘 에바리스토(61)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지난해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과 함께 부커상을 공동 수상해 작가를 흑인 여성 작가 최초의 부커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lt;워터 댄서&gt;의 작가 타네히시 코츠. 다산책방 제공
<워터 댄서>의 작가 타네히시 코츠. 다산책방 제공

<워터 댄서>는 미국 남부에 노예제도가 남아 있던 19세기 중반, 흑인 노예들을 북부 자유 지대로 탈출시켰던 비밀 통로 ‘언더그라운드’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주인공 하이람은 흑인 노예 어머니와 백인 주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는 특출한 기억력을 지녔다. 그와 함께, 모종의 계기가 주어지면 사물이나 사람을 순간 이동시킬 수 있는 초능력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은 그가 자신의 이런 능력을 이용해 언더그라운드 요원으로 활약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나는 알아서 씻고 먹고 옷을 입을 수 있는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이 나오는 꿈을 꿔. 정원을 가꾼 사람에게 장미 정원이 주어지는 세상을 꿈꿔.”

하이람이 사랑하는 여자 소피아에게 하는 이런 말은 그의 꿈과 소망이 사소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임을 알게 한다. 흑인 노예들은 농장을 가꾸고 집안을 돌볼 뿐만 아니라 백인들의 의식주를 챙기고 그들의 발이 되어 움직인다. 하이람의 배다른 형인 백인 메이너드가 하이람보다 지력도 떨어지고 인격적으로도 미성숙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작가와 주인공 하이람은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의 관계를 헤겔의 저 유명한 ‘주인 노예 변증법’으로 설명한다.

“몰락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노예제도는 사람을 사치하게 만들고, 나태 속에서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메이너드의 상스러움은 메이너드의 엄청난 죄였지만 사실 메이너드는 상급자라는 계급 자체를 너무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하이람이지만, 정작 그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라 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깨끗이 지워져 있다.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릴 적에 죽었고, 그 충격 때문에 하이람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한 이가 다름 아닌 백인 주인인 아버지라는 사실은 소설 말미에 가서야 드러난다. 머리에 흙빛 물항아리를 얹은 채 주바 춤을 추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어머니처럼 아름답게 물항아리 춤을 추는 소피아에 대한 하이람의 사랑이 소설 제목을 낳았다.

하이람의 현재가 소피아이고 과거가 어머니였다면 그의 뿌리는 할머니 산티 베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화에 따르면, 산티 베스는 엠 카운티의 연대기에 기록된 노역자(노예)들의 탈출 중 가장 규모가 거대한 마흔여덟 명의 탈출을 이끌었다. 그것도 단순한 탈출이 아니었다. 그들이 향했다는 장소가 중요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로 갔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할머니의 신화 그리고 소피아에 대한 사랑으로 하이람은 언더그라운드 활동에 나서게 된 셈인데, 이 남자 흑인 주인공의 이념과 실천에 여성들이 단지 동기 부여자로만 구실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한테 백인 남자를 유색인 남자로 바꾸는 건 자유가 아니야”라는 소피아의 말은 하이람이 자칫 간과할 수도 있을 그의 남성 중심주의를 지적하며 그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이끈다.

&lt;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gt;의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 ⓒ Jennie Scott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의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 ⓒ Jennie Scott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구십대 할머니에서부터 십대 말 청년에 이르기까지 흑인 여성 열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레즈비언 연극 연출가인 앰마를 중심으로, 역시 레즈비언인 그의 친구 도미니크, 앰마의 딸 야즈, 이성애자 교사인 앰마의 친구 셜리, 셜리의 제자로 학창 시절의 아픔을 딛고 빈민 출신에서 은행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캐럴 등의 이야기를 통해 흑인 여성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문학에 흑인 영국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그 존재를 열두 명으로 축약했다”고 한 작가의 인터뷰 발언이 작품의 문제의식을 알게 한다.

소설은 앰마가 연출한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의 개막 공연이 런던의 국립극장 내셔널 시어터에서 열리는 저녁을 중심으로 짜였다. 젊은 시절부터 단짝 도미니크와 함께 비주류 페미니즘 연극 운동을 해 온 앰마가 처음으로 주류 무대에 오르는 것. 여전히 사회주의 극단을 운영하며 비주류를 고집하는 남성 동성애자 실베스터는 그런 앰마를 가리켜 “야망을 위해 원칙을 버린 거”라며 “기득권자”에 “변절자”라고까지 비난하지만, 아프리카 베냉의 다호메이 왕국에서 왕을 보좌했던 여전사들을 레즈비언으로 해석한 이 작품은 물론 주류 연극계에 대한 비주류의 습격이요 ‘접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늘 밤 아프리카 여자 동성애자가 여성의 힘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았지”라는 도미니크의 말이 그런 맥락을 요약한다.

그런 엄마에게 ‘페미나치’(전투적 여성 우월주의자) 딱지를 붙이며 “나는 인도주의자야,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높은 단계지”라 들이받는 맹랑한 딸 야즈, 앰마에게 정자를 제공함으로써 야즈의 아버지가 된 속물 좌파 흑인 동성애자 지식인 롤런드, 사랑의 이름으로 도미니크를 길들이고 지배했던 남성 혐오주의자 은징가 같은 흥미로운 인물들이 인종별·성별 소수자 운동의 현황과 과제를 다각도로 보여준다. 에바리스토는 운문과 산문을 넘나드는 글쓰기로 유명한데, 이번 소설에서도 마침표가 없이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발랄한 스타일로 읽는 재미를 더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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