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푸른숲(2020)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첫눈에 반한 사랑’은 어느 날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이야기이다. 언뜻 보면 그런 것만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인식하기 전에 이미 몇 번이고 스쳐 지났다. 운명이라고도, 우연이라고도 하는 어떤 힘이 두 사람을 붙였다 떨어뜨려 놓고, 길을 막기도 하고 돌아가게도 했다. 그렇지만 그 힘은 그들 옆에 늘 있었다. 이스라엘 작가 요아브 블룸의 <우연 제작자들>은 이런 우연이 인간의 형체를 하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커피숍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고 때문에 만나 사랑하게 되는 두 사람, 하지만 그건 누가 미리 만들어놓은 과정이었다면? 사소한 사건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되고, 그 결과 작곡을 시작해서 훌륭한 음악가가 된 사람, 해고는 미리 꾸민 작전이었다면? 세상 뒤편에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우연 제작자들과 그들을 양성하는 집단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수수께끼, 심지어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가이, 에밀리, 에릭은 3년 전 수련과정에서 만난 우연 제작자이다. 그들은 인연 맺기나 재능 발견 등의 우연 제작을 맡는다. 이들과 또 다른 우연 제작자들이 세계에서 우연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사건을 미리 계획하고 실행하여 개인과 세계의 운명을 바꾼다. 그들의 작전 아래 깔린 원리를 이론적으로 서술한 장이 중간에 삽입되며, 우연의 과학을 구성해나간다. 친한 동료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은 에밀리와 가이, 운이 좋은 세계적 청부살인업자, 그들 뒤에 있는 전설적인 우연 제작자들이 뒤얽힌 스릴러이자 로맨스, 판타지인 이 소설은 여러 번 읽었을 때 그 의미가 살아나는 작품이다. 이 책에는 나 같은 에너지 절약형 운명론자들이 좋아할 만한 설정이 있다. 새옹지마를 인생의 모토로 삼으며 인생의 행운과 불운에 대처해나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난 사건은 그 무엇도 우연이 아니며 언젠가 실현될 우주의 뜻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이 수동적 운명론에 머무르는 건 아니다. 우연과 세계의 행동 논리를 연구하는 많은 책이 그렇듯 결국 이 소설도 자기성찰적인 면모를 띤다. 우연 제작자들의 운명에도 우연 제작자가 있을까? 주체는 자신의 우연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해 “모든 우연 제작자가 사람인 건 아닐지 몰라도, 모든 사람은 우연 제작자”(398쪽)이고, 인간은 모두 자신의 우연을 만들 수가 있다고 답한다. 우리는 모두 용기와 희망으로 행운이 되는 우연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자기계발서처럼 들리는 교훈이기는 하지만, 우연 만들기는 당장 이 시점부터 실행해볼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읽은 우연으로부터 인생을 바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의미는 나중에야 깨닫게 되더라도.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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