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어느 날 문득 통신과 전자기기가 멈춘다면?

등록 2020-10-30 04:59수정 2020-10-30 09:31

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창비·1만4000원

돈 드릴로. ⓒ Joyce Ravid
돈 드릴로. ⓒ Joyce Ravid

미국의 원로 작가 돈 드릴로(84)의 신작 소설 <침묵>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중편 분량인 이 작품은 2022년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이 열리는 일요일,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통신과 전자 기기가 멈추는 근미래의 재앙을 소재로 삼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해 그가 사는 뉴욕이 봉쇄에 들어가기 몇 주 전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작가는 밝혔는데, 팬데믹이 초래한 고립과 단절, 혼란을 예견했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출간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

소설의 무대는 뉴욕 맨해튼의 한 작은 아파트. 은퇴한 물리학 교수 다이앤과 미식축구광인 그의 남편 맥스, 다이앤의 옛 제자인 마틴이 모여 있고, 파리 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의 친구 테사와 짐 부부가 합류한다. 아파트에 먼저 모인 이들은 텔레비전 화면이 꺼지고 먹통이 되는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테사 부부는 자신들이 탔던 비행기가 불시착하는 과정을 통해 재앙의 도래를 확인한다.

다섯 인물이 좁은 아파트 거실에 모여 공허한 말을 주고받는 연극적 상황이 소설의 거의 전부를 이룬다. 역병을 피해 모인 이들의 이야기 잔치를 그린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을 닮았는가 하면,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오르게도 한다.

재앙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중국의 해킹과 태양흑점 활동에서부터 전력망 붕괴, 핵무기 작동 불능, 생물학적 공격, 해수면 상승, 테러리즘의 확산, 자살폭탄 테러 등 가능한 온갖 위험성을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아인슈타인에 꽂힌 물리학도 마틴은 “이것을 3차대전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게 바로 그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정작 아인슈타인과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방점은 그 다음에 찍혀 있다. “3차대전에서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4차대전에서는 몽둥이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이 말은 책 맨 앞에 제사(題詞)로서 놓여 있다.

“평생 동안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이런 것을 기다려왔어요”라고 말하는 마틴이 재앙을 대하는 염세적 태도를 대표한다면, 시를 쓰는 테사의 태도는 그와 사뭇 다르다. “가장 단순한 육체적인 것들을 챙겨야 해. 만지고, 느끼고, 물어뜯고, 씹고. 몸은 그 나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암울한 상황일수록 오히려 기본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흘려 들으며, 다만 “텅 빈 화면을 응시”할 뿐인 맥스의 유령 같은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텅 빈 텔레비전 화면은 그의 응시에 답을 할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