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회원들이 검찰의 디지털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을 규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불태워라: 성난 여성들, 분노를 쓰다
릴리 댄시거 엮음, 송섬별 옮김/돌베개·1만5000원
분노는 불편하다. 직면하면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이다. 여성인 나는 성장하며 분노하지 말 것, 분노하더라도 드러내지 말 것을 배웠다. 여자가 분노로 모든 일을 그르치기에 십상이라는 교훈적인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집에서, 일터에서, 사적인 모임에서 분노하는 사람은 경계와 교정의 대상이다. ‘화내지 말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화내기’를 온라인서점 검색창에 써넣었다. 인기도서 트렌드에 따르면 엄마는 아이에게 화를 내면 안 되는 사람이다. 일터에서도 어떤 성별이 분노했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남성이 화를 내면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 여성이 화를 내면 “너무 감정적인걸”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러니 나는 분노를 ‘처리’하는 데만 급급했다. 분노할 만한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나는 화가 난 게 아닙니다. 불합리한 부분을 정당하고 침착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의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골몰한다. 분노는 정말 불편하다.
“우리의 분노가 목소리를 얻기 위해 유용해질 필요는 없다. (…) 나는 이들의 분노에 타인의 이익을 위해 포장되고 이용되지 않는, 오로지 분노를 위한 자기만의 방을 주고 싶었다.” 여성 작가 22명의 분노에 관한 에세이를 <불태워라>로 엮은 릴리 댄시거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는 ‘분노해도 괜찮아’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 내 안의 ‘불편함’을 마주 봐야 했다. 억지스럽고, 지나치게 예민하며, 피하고 싶어지는 울분에 찬 눈물을 맞닥뜨리게 될까 불편했다. 글 속으로 풍덩 뛰어들기를 주저했다. 떠밀리듯 글을 읽었으나, 이내 신이 났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불태우는 캠프파이어에 참여한 기분이다. 인종, 젠더, 성적 지향, 출신지, 소속 공동체, 나이 등 처한 환경이 모두 다른 여성 22명이 가부장제 아래 겪은 분노의 색은 다채롭다. 다채로운 분노를 가감 없이 꺼내고 모아 피운 불로 가부장제와 성차별이 공고한 사회에 균열을 만든다. 릴리 댄시거는 “여성들이 엄청난 분노를 더는 억누르지도, 꺼버리지도 않고, 이 책의 책장들을 활활 태워 연기를 피워 올리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 바람은 허황한 것이 아니었다.
22명 작가의 분노에 관한 글을 읽으며 놀란 건, 어느 구석이건 나의 분노에 관한 경험과 닿은 지점이 있다는 거다. “내가 언제나 분노를 무시했거나 간과했던 것은, 분노 대신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잃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보네 파트리스 토머스, ‘흑인 여성에게 허락된 한 가지 감정’), “특정한 종류의 분노가 내 속에 요동쳤는데, 그 분노는 반항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수치심이기도 했다.”(멀리사 피보스, ‘레벨 걸’), “나는 분노를 억누르고 솎아내고 편집해서 슬픔을 무언가로 만들어 버렸다.”(머리사 코블, ‘우리가 화날 때 우는 이유’) 나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이 맞닿은 지점에서 안도했다. 감추고 거리 두어야 할 나의 분노가 드디어 제대로 이해받아 느끼는 안도감이다. 그리고 22편의 글들을 읽는다면, 여성 누구나 그런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노를 쓰레기처럼 처리하지 않고, 분노하는 나도 나임을, 그래서 나는 분노해도 되는 인간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분노’를 이 사회가 통제하는 방식을 다룬 부분에선 막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분노 통제의 역사는 너무 길고, 통제하려는 권력의 힘은 너무 세기 때문이다. 로언 히사요 뷰캐넌은 “사회적으로 남성의 분노가 종종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반면 여성의 분노는 비호감과 비합리를 상징한다. 어쩌면 남성들 역시 행그리(헝그리(배고픈)와 앵그리(분노)의 합성어)하지만 사회가 그들의 분노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하는 건지도 모른다”(‘행그리한 여성들’)라고 했다. 에세이들 속에서 이런 보편의 진실을 확인할 때마다 이 사회 전체가 남성을 기꺼이 정당화하는 데 노력하지만, 왜 여성은 그런 노력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건가 하며 분노에 다시 불을 지피게 된다.
여성 작가들이 분노를 피워 올린 불길 속에서 한국 여성의 분노를 떠올려본다. ‘혜화역 여성 시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규탄 시위’, ‘사법부 성범죄자 부당 판결 비판 시위’, ‘디지털 성폭력 반대 시위’, ‘낙태죄 전면 폐지 시위’ 등. 거리낄 것 없이 분노하는 여성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면서 실제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가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그래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여성, 당신의 분노를 다듬으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분노를 날것 그대로 꺼내놓고 마주 보기를 촉구하는 것을 말이다. 내 안의 분노를 뜨거워 어쩔 줄 몰라도 되고, 그 에너지로 무엇이든 해도 된다. 만일 분노로 무엇이든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불태워라> 속 다양한 분노 에너지 활용의 사례를 참고하도록 하자. “분노를 억누르는 것,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는 법을 배울 만큼 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장기화된 분노는 저항의 연료로 증류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기쁨과 소속감의 순간을 가져다 줄 수 있다.”(리사 팩토라보셔스, ‘분노의 가마로부터’)
미국에 사는 22명 여성들의 분노에 관한 경험은 그저 흔한 남의 경험으로 칠 수 없다. 여성의 분노를 긍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여성에게 보내는 연대의 편지이자 선언문이다. 정말로 이들과 함께 모여 신나게 분노하는 걸 상상해 본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위해 분노해 주길 바란다면, 평생 동안 기다리기만 해야 할 테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전부 태워 없애고 이전보다 더 낫게 다시 만들 생각에 신이 난다.”(키아 브라운, ‘나 자신과 함께하는 전쟁’)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