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민중과 시민, 식민·전쟁·독재 뚫고 현대 한국 만든 주체”

등록 2020-10-16 04:59수정 2020-10-19 11:2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학술용어’, 한반도 역사와 과제 제시
해당 전문 연구자 18명 협업으로 한국학·한국사 핵심 용어 정리

한국학 학술용어

한국학중앙연구원 편저/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4만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한국학 학술용어>를 펴냈다. 역사학자 안병욱 원장의 주도로 2년여에 걸친 준비 끝에 나온 <한국학 학술용어>는 한국학 연구의 거점 구실을 하는 중요 용어 가운데 18가지를 뽑아 정리한 일종의 논문 모음이다. 항목마다 그 분야 전문 학자들이 용어의 정의에서부터 학술적 정립 과정과 남은 쟁점까지 두루 심도 있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학·한민족 같은 기초 용어에서부터 전통·근대·실학·민중과 같은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한국을 아는 데 필수적인 근현대사의 학술 연구 흐름도 해당 항목을 통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근현대사의 학술적 쟁점을 살핀 후반부다. 19세기 말 이후 식민·해방·분단·전쟁을 거친 지난 100여 년은 한국사에 전례 없는 격동기였으며, 오늘의 한국 사회를 낳은 고통스러운 출산의 시간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는 한국학 또는 한국사 연구에서 지우기 어려운 학문적 상처를 안긴 시기였다. 이 책은 이 시기에 형성된 ‘식민사학’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역사학자 이만열은 ‘식민사학’을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합리화해주고, 식민정책을 뒷받침해주는 어용적 성격을 농후하게 지닌 연구”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 항목을 집필한 역사학자 전우용(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은 식민사학의 핵심 내용을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으로 요약한다. 한민족이 고대 이래로 줄곧 주위의 큰 세력에 휘둘렸으며 오랫동안 정체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이런 전제 위에서 식민사학을 구축해 근대화에 앞선 일본이 낙후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는 인식을 식민지에 주입했다. 식민지 백성의 의식을 짓누른 이 식민사학은 해방 뒤에도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낙인처럼 남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사학에 맞서 자주적인 역사학을 세우려는 한국인들의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는 강렬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고대사를 재해석해 일제의 타율성론에 맞섰으며,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정체성론을 비판했다. 이런 역사학의 반격은 해방 뒤, 특히 4·19 혁명 뒤 민족의식의 재각성과 함께 사학계의 큰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 책은 이런 반식민사학 연구를 ‘내재적 발전론’으로 명명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한국사를 내적 발전의 역사로 이해했다. 이 흐름은 1961년 역사학자 이기백이 <국사신론>을 출간하면서 시작돼 1970년대까지 주류를 형성했다. 하지만 내재적 발전론은 ‘서구 모델의 적용, 이론의 결핍, 지나친 실증 의존, 민족적 자부심의 과장된 표현’ 따위의 한계를 노출했다. ‘내재적 발전론’ 항목을 집필한 역사학자 이영호(인하대 교수)는 이 한계를 극복한 역사학 연구로 1980년대에 등장한 민중사학을 주목한다. 조선 후기 이후 민란과 항쟁을 주도한 민중을 근대 형성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인데, 민중의 발견은 우리 역사학의 도약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민중이라는 변혁 주체는 한국 현대사에서 오랜 민주화 투쟁을 거쳐 시민이라는 새로운 성격의 주체로 이어졌다. ‘시민사회’ 항목을 쓴 사회학자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은 서구 시민사회가 부르주아계급의 이해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과 달리,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가권력의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됐음을 강조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결성과 함께 급속히 성장했다. 더 주목할 것은 국가에 대항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이다. 그런 역동성이 폭발한 것이 2002년 이후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촛불시위’다. 특히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는 축제와 놀이로서 시위 문화를 창조했으며, 2016년의 촛불시위는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며 전례 없는 강도로 시민사회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학문과 실천 양면에서 한국 사회는 지난 100여 년의 질곡과 굴절을 넘어 일제의 식민지배와 식민사학이 남긴 낙인을 씻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과거의 유산도 있는데, 이 책은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가르는 분단이라는 상처에 주목해 ‘분단체제’라는 항목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다. 이 항목을 집필한 이종석(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해방 직후 한민족 가운데 누구도 분단을 용인하지 않았고 당연히 분단 상태가 곧바로 해소되리라고 기대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한반도 민중의 염원과 달리 남북 분단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 체제로 굳어지고 말았다. 한반도 분단 상황을 분단체제로 개념화하고 분단체제론으로 발전시켜온 학자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다. 그러나 분단체제론도 이 이론에 앞선 학술적 논의 속에서 탄생했음은 물론이다. 분단체제론의 선구자 구실을 한 것이 역사학자 강만길이 주장한 ‘분단시대’다. 강만길은 1978년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에서 분단 극복이라는 강한 실천적 의식 속에서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로 명명했다. 백낙청은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을 겪으며 ‘남과 북을 별개의 분석 단위로 삼아서는 한국 사회 현실을 총체적으로 진단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분단모순에 주목해 분단체제론을 내놓았다. 세계자본주의체제 아래서 남한과 북한이 별개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적대적 체제를 이루고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이종석은 분단체제론이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사회를 완성하는 데 분단체제 극복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켰으며,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설명하는 힘 덕에 1980년대 변혁이론들이 대다수 사멸한 뒤에도 유용한 이론으로 남았다고 평가한다.

이 책의 ‘한국학’ 항목(집필 이지원 대림대 교수)은 분단체제론이 지닌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한국학이 남북을 아울러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하고, 지구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냉전 잔재인 비무장지대(DMZ)를 넘어설 때 한국학은 21세기 평화학으로서 세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전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전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이영호 인하대 교수. &lt;한겨레&gt; 자료사진
이영호 인하대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1.

감탄만 나오는 1000년 단풍길…2만그루 ‘꽃단풍’ 피우는 이곳

[단독] “지코 추가해”…방시혁 ‘아이돌 품평 보고서’ 직접 공유 지시 2.

[단독] “지코 추가해”…방시혁 ‘아이돌 품평 보고서’ 직접 공유 지시

7년 만에 컴백 지드래곤, 신곡에 ‘마약 연루 사건’ 경험 녹였나 3.

7년 만에 컴백 지드래곤, 신곡에 ‘마약 연루 사건’ 경험 녹였나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4.

교보문고에 ‘한강 책’ 반품하는 동네서점 “주문 안 받을 땐 언제고…”

조경란, ‘문학사상사 마지막 주관’ 이상문학상 빛냈다 5.

조경란, ‘문학사상사 마지막 주관’ 이상문학상 빛냈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