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체론: 천황제 속에 담긴 일본의 허구
시라이 사토시 지음, 한승동 옮김/메디치·1만8000원
일본에서 ‘국체’는 1867 메이지 유신 이후 확립된 천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황제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배하고 ‘상징 천황제’를 받아들이면서 국체라는 말은 사실상 죽은 말이 됐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가 쓴 <국체론>은 국체가 패전 후에도 변형된 채로 존속해 왔으며, 그 국체의 존속이 일본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한다.
시라이는 이 책에서 일본의 국체를 ‘전전 국체’와 ‘전후 국체’로 구분한 뒤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논증한다. 전전의 국체가 천황을 정점으로 한 통치체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전후 국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줄이면, 미국이 천황을 대체해 천황 자리에 앉은 ‘변형된 천황제 통치체제’라는 것이 시라이의 주장이다.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일본을 미국의 보호를 받는 종속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 정치는 천황의 뜻을 따르듯 미국의 지배에 순종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 아래 이 책은 천황을 핵심으로 한 ‘전전 국체’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후 국체’를 각각 3단계로 나누어 비교·분석한다. 전전 국체는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1912년까지 ‘형성기’를 거쳤다. 이어 1913년부터 1930년까지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상대적 안정기’가 왔다. 이 시기에 천황제는 단단해졌지만 겉으로는 천황이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1931년부터 1945년까지는 천황 친정 체제 형식의 군부통치 체제 아래 일본이 전쟁과 패망으로 치달은 시기로 시라이는 ‘국체의 붕괴기’라고 명명한다.
이 전전의 역사와 유사하게 미국이 일본에 전후 헌법을 강요하고 미-일 안보체제가 구축돼 확고해진 1970년대 초까지가 전후 국체의 ‘형성기’이며,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일본 경제가 승승장구하던 시기가 ‘상대적 안정기’를 이룬다. 이때 일본은 미국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일본 제일’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 이후부터 지금까지가 ‘전후 국체의 붕괴기’다. 사회주의권 해체로 반공 기지로서 일본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일본 내부에서는 거품경제의 붕괴로 경제 위기가 계속된 시기인데, 이 시기에 일본 정치는 미국에 더욱 매달리며 스스로 종속화의 길을 달려왔다. 미·일 동맹체제에서 번성한 우익 세력이 안팎의 위기 속에서 미국이라는 천황을 한층 더 떠받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우익 세력은 전전 천황제에서 일본이 전쟁으로 치달은 것처럼, 자신들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나고 활력을 되찾기 위해 동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시라이는 말한다. 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만들고, 과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특수를 누려 경제를 살려냈듯이 새로운 전쟁으로 일본 경제를 되살려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이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체에 극렬히 반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동아시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는 이 위험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전전 국체가 파멸했듯이 지금의 일본도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이 책은 진단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