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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본정신이라는 말은 극우의 헛소리”

등록 2020-09-04 05:00수정 2020-09-04 16:12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맞서 싸운 철학자 도사카 준의 대표저작
상식과 이성 짓밟힌 시대 비판…극우로 치닫는 일본 사회의 해부도
일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도사카 준.
일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도사카 준.

일본 이데올로기론

도사카 준 지음, 윤인로 옮김/산지니·3만5000원

도사카 준(1900~1945)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교토대 철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뛰어든 도사카는 1932년 동료들과 함께 ‘유물론 연구회’를 결성해 기관지 <유물론 연구>를 펴내며 활동하다가 193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패전 직전인 1945년 8월9일 나가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본 이데올로기론>은 도사카가 유물론 연구회 활동에 매진하던 1935년 펴낸 일본의 지배 이데올로기 비판서다. 산지니 출판사가 전체 24권으로 펴내는 ‘제국 일본의 테오-크라시 총서’의 첫 번째 책으로 이번에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지은이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청년 마르크스가 1845~1846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를 모델로 삼아 쓴 책이다. 마르크스의 이 책은 오랫동안 수고 상태로 방치됐다가 1932년에야 처음으로 출간됐다. 도사카가 <일본 이데올로기론>을 펴내기 3년 전이다.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저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마르크스는 그 책에서 당시 유행하던 독일의 ‘진정 사회주의자들’ 곧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의 이론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의 작업과 유사하게 도사카도 <일본 이데올로기론>에서 ‘세계의 변혁’을 목표로 삼아 당대에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상들을 비판한다.

도사카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쓰던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군국주의·침략주의를 한층 더 노골화하던 시기였다. 이런 극우화 흐름 속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자유주의 사상이 위축되고 일본 국수주의 사상이 위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당연히 제국 일본에 가장 강경하게 맞서던 마르크스주의도 탄압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사카는 일본 사상계의 두 흐름인 ‘자유주의 진영’과 ‘국수주의 진영’을 동시에 겨냥해 비판의 칼을 휘두르며 자신이 옹호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명하게 세우려고 한다. 이런 비판을 해나갈 때 도사카의 눈길은 국수주의 진영보다는 오히려 자유주의 진영으로 더 많이 쏠린다. 자유주의 사상이 국수주의 사상의 발흥에 젖줄을 대줄 뿐만 아니라 ‘극우 파시즘’ 세력의 승승장구 속에서 이 흐름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토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타로.
교토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타로.

도사카가 보기에 일본 파시즘을 떠받치는 국수주의 사상은 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곤해서 “절실하게 어리석은 거대한 희비극의 지시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실상을 폭로하는 일은 ‘지극히 하찮은 일’이지만, 날로 증대하는 영향력 때문에 폭로 작업은 ‘지극히 중대한 의무’가 된다. 이 극우 세력이 당시 즐겨 쓰던 말 가운데 하나가 ‘일본정신’인데, 내용을 따져보면 ‘목소리만 있고 정체는 없는 복화술’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정신’이라는 말이 퍼져나가는 것은 그 텅 빈 말에 국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본정신의 위대함을 주장하는 ‘일본주의’는 ‘동양주의’로, ‘아시아주의’로 확대된다. 일본정신이 동양(동아시아)을 넘어 아시아 전체의 정수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단순히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아시아 전체의 지배자가 된다는 침략주의 야망을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그런 망상은 마지막에는 세계정복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고 그 끝은 일본 ‘국수’의 몰락이라고 도사카는 예언한다.

일본주의에 이어 해부대에 오르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이다. 자유주의 진영은 극우 일본주의의 발호를 저지해야 할 위치에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주의에 사상의 자양분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상의 유약함 때문에 일본주의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만다. 이 책에서 도사카는 일본 자유주의 철학의 대표자로 도쿄대 윤리학 교수 와쓰지 데쓰로(1889~1960)와 ‘교토학파’의 창시자 니시다 기타로(1870~1945)를 거론한다. 와쓰지는 진정한 윤리학은 일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일본주의 사상으로 이어질 통로를 마련해주며, ‘무의 논리’ 위에 선 니시다의 철학은 낭만주의적인 정조로 그 지지자들을 파시즘 사상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

도쿄대 윤리학 교수를 지낸 와쓰지 데쓰로.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도쿄대 윤리학 교수를 지낸 와쓰지 데쓰로.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 책에서 도사카의 날카로운 안목은 ‘상식’과 ‘계몽’을 이야기할 때 특히 빛난다. 도사카는 상식(코먼 센스)이라는 말의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감각’(코이네 아이스테시스)에 닿아 있으며, 이 말이 중세를 거쳐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토머스 리드(1710~1796)의 상식론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인간 내부의 공통감각이 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의 공통감각으로 재해석되면서 사회적 상식으로 정착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도사카가 보기에 상식은 계급을 초월하는 ‘공통감각’일 수 없다. 사회에는 부르주아적 상식도 있고 프롤레타리아적 상식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사카가 더 주목하는 것은 파시즘이 폭주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이런 상식들이 패퇴하고 극우의 주장이 상식 위에 군림하는 현상이다. 그런 위태로운 상황을 도사카는 이렇게 묘사한다. “상식은 오늘날 땅 위의 어느 곳에서도 더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식은 ‘지하실’ 같은 곳에 감금당하고 말았으며 상식의 숨통은 짓눌려 끊어지고 만 것처럼 보인다.” 계몽이라는 것도 상식과 똑같은 위기에 몰렸다고 도사카는 말한다. 오늘날 ‘계몽’과 ‘이성’이 모두 파시즘의 위세에 눌려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극우 이념이 이성을 참칭하고 계몽을 자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20세기 역사가 보여준 대로 도사카가 신봉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 패배해 사상의 최전선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주의 일본을 변혁하려고 했던 도사카의 이상까지 패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사카의 시대 비판은 갈수록 극우로 치닫는 오늘 일본 사회의 심장을 해부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재형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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