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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에이허브의 ‘모비딕’, 이슈메일의 ‘모비딕’

등록 2020-09-04 04:59수정 2020-09-04 10:04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

오찬영 지음/북드라망·1만3500원

19세기 미국 작가 허먼 멜빌(1819~1891)의 대표작 <모비딕>은 미국 문학사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흰 고래 ‘모비딕’을 잡으려는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 어린 집착을 그린 소설이다. 공부 공동체 ‘감이당’ 멤버 오찬영씨가 쓴 <모비딕, 삶과 운명을 탐사하는 두 개의 항해로>는 이 독특하고도 장대한 소설을 ‘삶과 운명’의 이야기로 읽어가며 소설의 구조와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는 책이다.

지은이가 주목하는 <모비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성서의 차용과 변주다. 멜빌은 독실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10대에 선원이 돼 바다 생활을 했지만 멜빌은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성서를 깊이 체득했고, 그런 이력을 살려 <모비딕>에 성서의 이야기와 이미지를 무수히 불러들였다.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은 구약 ‘열왕기 상’에 나오는 폭군 아합과 이름이 같으며, 에이허브 선장의 관찰자인 이슈메일은 아브라함이 시녀 하갈을 첩으로 들여 낳은 아들 이스마엘에서 왔다. 거대하고 무서운 고래 ‘모비딕’은 구약 ‘욥기’에 등장하는, ‘압도적인 크기와 경이로운 힘’을 지닌 바다 짐승 ‘레비아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멜빌은 이 구약의 인물과 에피소드를 가져와 자기 식으로 변형하거나 전혀 다른 이미지로 재구성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모비딕>은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의 은유이기도 하다. 에이허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 호 자체가 온갖 인종이 뒤섞인 인종의 용광로이다. 눈여겨볼 것이 여기서 고래를 실제로 사냥하는 작살잡이는 모두 유색인종인 데 반해 선장과 항해사는 모두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백인이 두뇌 구실을 하며 유색인을 부리는 미국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피쿼드 호가 고래를 사냥하러 대양을 질주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복욕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인다. <모비딕>의 이야기는 팽창주의 야욕에 불타는 미국의 이야기다.

이 책이 더 주목하는 것은 선장 에이허브와 관찰자 이슈메일의 대립적 성격이다. 두 사람은 한배를 타고 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인생의 항로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모비딕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드는 에이허브는 종말론적 분위기를 풍기는 열정으로 불탄다. ‘에로스’ 곧 삶의 욕구에 미친 에이허브는 동시에 ‘타나토스’ 곧 죽음의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이슈메일은 에이허브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이슈메일은 관찰하고 의심하는 로고스적 인간이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빠져들지 않는 균형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삶이 종말을 향해 치닫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과 에이허브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분이다. 두 사람은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대적 관계를 이룬다. 이 관찰자 이슈메일을 중심에 두고 <모비 딕>을 읽어 나가면, 이 책은 한 사람의 성장 소설이자 항해 철학서로 변모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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