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책거리
*이 글에는 <이어즈&이어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이어즈&이어즈>는 근미래를 다룬 에스에프 드라마입니다. 트랜스휴먼 기술이 발전하고,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과 정당이 인기몰이를 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이 거칠게 무력으로 부닥치며 경제는 무너지고 세계가 망가집니다. 극우 정치인은 약자를 먹잇감으로 던지고 혐오와 반지성을 무기로 내세워 서민의 지지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죠. 끝내 공영방송까지 송출을 중단하고 세상이 혼돈에 빠져들어 주인공 가족들은 피난처로 모이는데, 그곳이 오래된 할머니의 집입니다.
최근 나온 <창작과비평>(2020년 가을호)은 리베카 솔닛이 쓴 글을 실었습니다. 남자답지 못하다며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기후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극단적 이기심으로서의 남성성”을 강하게 비판한 글입니다. “마스크의 부재, 의학적으로 중요한 규제에 맞서는 호전적 태도”는 이 시대의 테러리즘이라고 할까요. 미국에서도 보육기관과 여름 캠프가 중단됐고 여성들은 가장 먼저 일터에서 밀려났습니다. 여자는, 아이들은, 약자는 어디로 피하면 됩니까?
정미경 소설가는 칼럼 ‘대피소에 관하여’(6면)에서 코로나 시대의 과제를 던집니다. “전염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집에 머물러 달라’라고 말할 때는 안전한 곳으로서의 가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필요하다”고 말이죠. 집안에서의 과도한 노동과 폭력이 두려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어즈&이어즈>에서 할머니는 말합니다. 한 괴물을 무찌르고 나면 또 한 괴물이 온다고요. 괜찮습니다. 선한 퇴치자도 계속 나오고 퇴치법도 생길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전면전을 시작할 때까지는 쉼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식물의 사유>를 쓴 철학자들은 식물 속으로 피난하라고 하는데, 전복적인 상상인지 현학적인 추상인지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이유진 책지성팀장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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