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투명 차별’ 안 보이세요?

등록 2020-07-17 06:00수정 2020-07-17 09:29

남성 ‘디폴트’ 세계 속 편향된 데이터가 지우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제설부터 재난까지 젠더 데이터 공백이 여성에 미치는 위협 밝혀

보이지 않는 여자들: 편향된 데이터는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지우는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8500원

스웨덴 칼스코가 시(市)는 전통적으로 인도보다 도로에 쌓인 눈을 먼저 치워왔다. 그러다 2011년, 모든 시 정책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을 계기로 제설 작업 순서를 변경했다. 바꾸니 보였다. 기존 제설 작업이 성차별적이었다는 사실이. “보행자가 미끄럽거나 얼어붙은 도로에서 다칠 확률이 운전자의 3배나 되고 (…) 이 보행자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여자들은 아이나 노부모를 학교나 병원에 데려다주고, 퇴근길에 장을 보는 등 ‘돌봄의 의무’를 대체로 더 많이 지는데, 이 의무가 여성의 이동 패턴을 ‘연쇄 이동’(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짧은 거리를 여러번 이동하는 양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시가 성인지적 관점에서 정책을 다시 보라고 주문하기 전까지 당국자들은 이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책 결정권자 대부분이 남자였고, 장거리 운전이라는 자신의 이동 패턴만을 떠올려 작업 순서를 정했기 때문이다. 빙판길이 여성에게 한층 위협적인 환경이 된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남성을 기준으로, 남성이 설계한 세상이 여성에게 얼마나 적대적인지를 논증하는 책이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남성을 ‘디폴트’(기본값)로 설정하면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데이터 공백’이 발생하며, 이는 여성에게 적게는 불이익, 심하면 생명의 위협까지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보이지 않는) ‘성차별에 관한 백과사전’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사례를 담았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의 트럼프까지, 방글라데시부터 미국의 실리콘밸리까지 동서고금을 오가며 남성 디폴트 세상이 여성에게 얼마나 유해한지를 조목조목 따진다.

‘성 중립적 제도’ 안에 잠복한 차별

대놓고 차별적인 제도도 있지만, 은밀하게 차별적인 제도가 더 많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건 바로 이 은밀한 차별이다. 언뜻 ‘성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차별을 품고 있는 제도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잉글랜드은행은 지폐 뒷면을 장식할 위인을 선정하기 위해 ‘중립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역사에 길이 남는 공헌을 한 사람일 것,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됨.’ 이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일견 무해해 보이는 요건도 사실은 남성 편향의 일부다. 역사학자 로럴 새처 울릭의 유명한 말처럼 ‘온순한 여자는 역사에 남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누나 파니 헨젤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펠릭스 멘델스존의 사례를 들며, “당시에는 여자의 업적을 남자의 것으로 돌리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은행의 두 번째 요건 역시 실상은 여성들에게 불리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차별적인 사회상에 대한 ‘데이터 공백’이 이처럼 겉은 중립이지만 속은 차별인 제도를 양산하는 셈이다.

비슷한 일은 미국에서 종신 교수를 뽑을 때도 되풀이된다. 미국 대학의 학자는 ‘테뉴어 트랙’에 올라서 7년 안에 종신 재직권을 받지 못하면 해고되는데, 문제는 통상 박사학위를 받고 종신 재직권을 받기까지의 기간(30∼40살)이 여성들이 임신을 시도하는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결혼·출산·육아 때문에 종신 재직권을 따기 힘들어지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미국 대학들은 아이 한 명 낳을 때마다 종신 재직 심사 기한을 1년씩 연장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이 정책 시행 뒤 여성이 첫 학교에서 종신 재직권을 받을 확률은 22% 감소한 반면, 남성은 19% 증가했다(1985∼2004년 미국 경제학과 순위에서 50위권에 든 학교의 조교수 조사결과). 여성 차별을 개선하려고 도입한 제도가 오히려 남성에게 이득이 된 셈이다. ‘성 중립적으로’ 모두에게 이 정책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추가 기한이 필요한 사람은 성 중립적인 ‘부모’가 아니라 ‘엄마’들”이라고 지은이는 일갈한다. 중립에 내재한 편향을 읽지 못하면, ‘모두’를 위한 제도도 남성에게만 바치는 제물이 된다.

지은이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지은이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재난’아닌 ‘젠더’ 때문에 죽는다

앞서 거론한 사례는 ‘불이익’의 범주로 묶이지만, 이제부턴 ‘위협’에 더 걸맞다. 남성을 표준으로 제작된 모든 것이 여성에게 해로울 가능성이 크다. 지은이는 2013년 남성의 보폭(여성보다 9∼10% 더 크다)에 맞춰 행군하다 골반뼈가 네 군데 부러져 제대한 영국 공군 이야기, 소변 한 번 보려면 점프수트를 다 벗고 다시 입어야 하는 바람에 실외에서 연구할 때마다 동상 위험에 노출된 알래스카 여성 과학자 이야기 등을 거론한다.

더 일상적인 위협도 있다. 바로 자동차다. 2013년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 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은 교통사고 때 부상 위험이 남성보다 중상 47%, 경상 71%, 사망 17% 높다. 원인은 ‘남성 디폴트’다. 자동차 충돌 시험에 쓰이는 인형은 키 177㎝, 몸무게 76㎏ 체격에 남성의 근육분포와 척추를 가졌다. 여성 인형으로 시험하는 건 의무가 아니고, 시험을 한다 해도 ‘조수석’에 앉혀질 뿐이다. 지은이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7개월 이상 임부 62%가 표준 안전벨트를 매지 못하고, 태아 사망 원인 1위가 자동차 사고임에도 임신부를 위한 안전벨트조차 없는 상황이다. (한국에는 임신부용 안전벨트를 별도로 판매하는 곳이 있으나, 일부 자동차회사는 ‘이 제품이 더 위험할 수 있다’며 쓰지 않기를 권장할 뿐, 자사가 직접 더 안전한 벨트를 만들지는 않는다) 병원에서도 ‘여성 데이터’는 공백 상태인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거주하는 5∼24살 여자는 같은 나이 남자보다 HIV양성일 확률이 6배나 높지만 (…) 항레트로바이러스 연구 피험자의 19.2%, 백신 연구 피험자의 38.1%, 치료법 연구 11.1%만이 여자”(2016년 논문)이고, 여성의 심장마비 전조증상(복통, 호흡곤란, 메슥거림)이 남성(가슴통증)과 달라 여성 심장병 환자들이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도 있다. 여성은 호르몬 때문에 ‘성가신 피험체’여서 곧잘 연구에서 배제되기에 데이터 공백이 발생하고, 이 공백이 여성을 위험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 상황도 여성에게 더 치명적인데 이는 “여자는 집에서 와병 중인 환자의 돌봄노동을 담당하고, 또 바이러스에 노출될 위험이 큰 ‘병원에서 일하는 조산사, 간호사, 청소부, 세탁부’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재해 역시 여성에게 더 ‘재난’이 된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여자가 수영을 배우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편견 탓에 여성이 홍수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현저히 낮았고, 스리랑카에서는 수영·나무타기를 남자아이들에게만 가르친 결과 2004년 쓰나미 사태 때 여성 사망률이 남성의 4배에 이르렀다. 1981년부터 2002년까지 141개국 데이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은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률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았는데,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국가일수록 사망률 남녀 격차가 작았다”고 한다.

결국 대안은 이 ‘남성 디폴트’를 해체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이 모든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여성은 여성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매끈한’ 제도 속에서 고통받을 때, 차별을 느끼지만 이를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울 때 한 번쯤 열어볼 만한 책이다. 저자가 끈질기게 그러모은 사례 속에서 그간 ‘보이지 않았던’ 차별의 실체가 마치 매직아이처럼 눈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1.

경복궁 주변 파봤더니 고려시대 유물이 줄줄이?

봉준호 “25년 감독 인생 처음으로 사랑 이야기 담았다” 2.

봉준호 “25년 감독 인생 처음으로 사랑 이야기 담았다”

‘오징어게임2’ 영희 교체설에 제작진 “사실은…바뀌지 않았죠” 3.

‘오징어게임2’ 영희 교체설에 제작진 “사실은…바뀌지 않았죠”

60년 저항의 비평가 “요즘 비평, 논문꼴 아니면 작가 뒤만 쫓아” [.txt] 4.

60년 저항의 비평가 “요즘 비평, 논문꼴 아니면 작가 뒤만 쫓아” [.txt]

오늘의 하이라이트 5.

오늘의 하이라이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