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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팬데믹, 새로운 공산주의의 요청

등록 2020-06-26 06:00

슬라보이 지제크, 코로나19 시대 ‘공산주의의 재발명’ 필요성 강조
‘뉴 노멀’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실행되는 공산주의를 요구한다”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북하우스·1만5000원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동혜원, 북하우스 제공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래픽 동혜원, 북하우스 제공
2020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반 년은 코로나19와 더불어 살아온 날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남은 반 년이라고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해가 바뀌기 전에 또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2020년은 무엇보다 코로나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제약은 아마도 가장 직접적이며 심각한 사변으로 경험되지 않을까.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라는 표현이 환기하는 것은 그것이 인류 전체의 삶에 근본적 성찰과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슬라보이 지제크가 새로 낸 책 <팬데믹과 패닉>(원제 ‘팬데믹: 코로나19가 세계를 뒤흔들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코로나19가 촉발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하게 만든 근본적 변화 쪽으로 독자를 견인한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지제크가 가리키는 변화의 방향은 ‘새로운 공산주의’다. 코로나19가 지구 전역을 휩쓰는 와중에 <한겨레>를 비롯한 매체들에 기고한 칼럼 성격의 글을 모은 이 책에서 그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감염병 대유행(팬데믹)의 위기와 공포(패닉)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우리가 끌어내야 할 교훈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장밋빛 미래를 밝혀줄 비전이 아니라 재난 자본주의의 해독제로 쓰일 ‘재난 공산주의’ 전망에 더 가깝다. 국가가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아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호흡기 같이 긴급하게 필요한 물품들의 생산을 조정하고, 호텔들과 다른 휴양지들을 고립시키며, 이번에 실직한 모든 사람의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등의 조치를 수행해야 함은 물론, 이 모든 일을 시장 메커니즘을 버려가며 해야 한다.”

근본적 성찰 요구하는 코로나 사태

이런 조치들은 많은 나라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거나 필요성을 인정받은 것들이다. 질병관리본부를 축으로 삼아 정부와 의료계, 시민 사회가 코로나19를 상대로 한 싸움에 일사불란하게 임하는 대한민국의 이른바 ‘케이(K) 방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로나19 환자를 위한 음압병상 동원, 자가격리, 확진자 동선 공개, 감염 공간 폐쇄, 마스크 5부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 등의 조치를 정부는 의료 전문가의 판단 아래 강제로 실행에 옮기고 시민들은 별 이의 제기 없이 그에 따르고 있다. 여기에다가 코로나19로 위축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재난기본소득 지급과 자영업자들에 대한 재정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예외적 사태 속에서 국가는 전에 없이 막강하고 폭넓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방역 같은 대규모 조치들이 군사적 규율에 의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강한 국가가 필요하다.” 시장 메커니즘으로는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 대다수에게 ‘공산주의적’으로 보이는 조치들이 전 지구적으로 고려될 것”이라고 지제크는 본다. 그가 보기에 코로나19의 확산은 공산주의를 꿈꾸고 시도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은 우리가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어떤 것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운행을 멈추었고, 온 나라에서 봉쇄를 시행 중이며,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한 채 집에 고립되어 있다. (…)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시 불가능한 것이어야 할 터다. 즉 현존하는 세계질서의 좌표들 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슬라보이 지제크. ⓒ이택광
슬라보이 지제크. ⓒ이택광
그렇다고 해서 지제크가 옛 소련으로 대표되는 “구닥다리 공산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백신이 개발되어 코로나19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더라도 “또 다른 유행병이나 생태적 재난의 위협”이 인류를 기다릴 것이다. 이처럼 항시적으로 위협에 시달리는 취약한 상황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실행되는 공산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그는 본다. 이런 공산주의를 일러 그는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의 변종으로서 ‘새로운 공산주의’라 말하기도 하고,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좇아 공면역주의(Co-immunism)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질서를 뭐라고 부를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처럼 “지속될 수 없는 항구적 자기 팽창을 요구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성장률과 이윤 가능성에 목매는 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상력과 집행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제크의 새로운 공산주의는 단일 국가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경제를 통제하고 규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국민국가의 주권에 제한도 가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형태의 조직”을 그는 염두에 두고 있다.

“아감벤과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한다”

그의 ‘새로운 공산주의론’에 대한 반론과 비난도 만만치 않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 철학자 한병철 등을 거명해 가며 그들의 반론을 다시 반박한다. 아감벤을 비롯한 ‘급진’ 좌파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봉쇄와 사업장 폐쇄 같은 조처들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질병을 핑계 대고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음모라는 것이다. 아감벤의 이런 주장이 대표적이다.

“매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독감에 불과한 바이러스의 위협에 비해, 이러한 제한 조치들은 분명 과도하다. 예외 조치들을 정당화하는 데 테러리즘의 쓸모가 바닥나자, 감염병을 발명함으로써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그러한 조치들을 확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구실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감염병의 위협을 경시하고, 국가의 통제에서 자유로웠던 코로나 이전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감벤 유의 주장이 트럼프 같은 극우 정치인들의 “일터로 돌아가라”는 구호와 통한다는 점이다. 코로나19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계층에게 ‘일터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얼핏 솔깃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냉정한 계급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지제크는 본다. “실제로 ‘일터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빈자들인 반면 부자들은 격리 상태에서 편안히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으니 ‘정치는 잊고 단결하자’고 흔히들 말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고 지제크가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피로사회>와 같은 저서에서 주체들의 ‘자기착취’를 강조한 한병철을 향해 지제크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을 양산하는 계급차별 시스템은 그대로 존속되며, 여기서 투쟁과 적대는 개인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제크는 ‘새로운 공산주의’를 향한 자신의 호소가 결코 돌출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 감염병은 물리칠 수 있지만 오직 정부기구 전체가 관여하는 집단적이고 협력적이며 포괄적인 접근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발언, “공공서비스를 의무적 책임이 아니라 투자로 보아야 하며, 노동시장을 덜 불안하게 만드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최근까지 특이한 것으로 취급된 정책들, 예컨대 기본소득과 부유세 등”을 진지하게 논의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영국 권위지 <파이낸셜 타임스> 사설 등을 보라. 영국의 보수주의 총리 보리스 존슨은 한시적인 철도 국유화 조처를 선언했고, 심지어는 트럼프조차 “정부가 민간 부문에 지시해 비상시 의료장비들의 생산을 독려하도록 하는 ‘국방물자생산법’(Defense Production Act)을 발동했다.

지제크는 코로나 시대의 인류가 ‘공산주의의 재발명이냐 새로운 야만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 짐짓 꿈과도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흡사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며 저녁에는 비평을 하는 공산 사회의 새로운 인간상을 꿈꾸었던 대목을 떠오르게도 한다.

“만일 현존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대표자들이, 꽤 오랫동안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분석가들이 지적해온 것을 이제 어느 정도 깨닫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시스템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지금과 같은 자유방임주의적 형태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지제크의 희망 섞인 가정은 현실에서 메아리를 얻을 수 있을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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