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이미경 글·그림/남해의봄날·2만3000원
구멍가게는 엉성하고 영세한 것의 대명사가 됐다. 대기업이나 정부가 최소한의 체계도 없이 일처리를 할 때마다 뜬금없이 소환돼 모욕을 뒤집어 쓴다. 그러나 구멍가게를 오래 지켜온 이가 내린 정의는 조금 다르다. “‘커져라, 세져라’ 하는 세상에서 작지만 단단하게 살아남은 것.”(정은영 ‘남해의봄날’ 대표), “작고 소소한 이야기까지 들리는 공간.”(이미경 작가)
두 사람은 구멍가게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이미경 작가(50)는 1997년부터 23년 동안 전국 곳곳을 뒤져 구멍가게를 그려온 화가다. 정은영 대표(48)는 이 작가의 그림과 글을 책으로 엮어낸 출판사 대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구멍가게 책은 총 두 권. 첫번째 책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2017년에 나왔고, 두번째 책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는 지난 15일 출간됐다.
이미경 작가가 구멍가게를 그리기 시작한 건 1997년. 경기도 광주에서 아이를 키울 때였다. 아이 들춰업고 산책하러 나왔다가 해질녘 석양을 등지고 있던 구멍가게에 홀렸다. 아이가 잠들기 무섭게 캔버스 앞에 앉았다. “하루 종일 아이 보느라 지친 나에게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냈다’는 어떤 위안 같은 게 필요했어요. 완성하고 나니 애초에 매료됐던 이미지보다 그림이 더 좋더라고요. 추억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기분이었어요.”
그날부터 구멍가게가 이 작가의 마음 속 ‘구멍’을 메웠다. “평생 딱 한 번이라도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게 제 작은 꿈이었어요. 대학 졸업 전에 결혼하고 아이 낳느라 전시 한 번을 못했거든요.”
구멍가게를 그린 지 올해로 23년. 지나온 골목마다 가위 표시해가며 들고 다녔던 종이지도는 로드뷰로 대체됐고, 필름 카메라가 들려 있던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여졌다. 이 작가가 그렇게 바라던 ‘전시 딱 한 번’의 꿈도 그림 한 점 두 점 블로그에 올린 게 발판이 돼 2007년 이루어졌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이마주 갤러리에서 이미경 작가(왼쪽)와 정은영 대표(오른쪽)가 구멍가게를 그린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 ‘작지만 단단한 화가’를 알아본 건 정은영 대표다. 페이스북에서 이 작가의 그림을 본 정 대표는 2015년 겨울 서울 인사동에서 전시를 하던 이 작가를 무작정 만나러 갔다. ‘남해의봄날’ 출판사가 있는 ‘통영’이 설득 포인트가 됐다. “잊을 만하면 메일 보내 ‘통영 한 번 오세요’ 했어요. 여기도 구멍가게 많아요. 저희도 책 파는 구멍가게고요. 호호.” 이듬해 봄 통영에 간 이 작가는 말 그대로 ‘남해의봄날’에 홀려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원고가 나왔다.
책 출간을 목전에 뒀을 때 ‘남해의봄날’은 시퍼런 겨울이었다. “2017년 <동전…> 나오기 직전에 출판사를 폐업하려고 했어요. 모든 게 수도권 중심인 나라에서 지역 출판사로 살아남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마케팅도 어렵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수억원대 빚을 진 상태였죠. 그와중에 겨우겨우 이 책을 냈는데, 동심을 간직한 4050 독자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열흘 만에 1만부가 나갔어요. 대한민국의 구멍가게와, 구멍가게를 20년간 찾아다닌 화가 덕분에 ‘책 파는 구멍가게’가 살아난 기적 같은 일이었죠.”
이미경 작가가 다녀갔던 구멍가게 주인에게 보낸 편지. 이미경 작가 제공
구멍가게 덕을 본 두 사람은 출판 마케팅도 차별화했다. 전국 동네책방을 성실히 순회하며 북토크 행사를 열었다. 부산의 한 동네책방에선 한 자리에서 100권을 판 적도 있다. 그러나 두번째 책 <…문 열었습니다>를 낼 땐 상황이 또 달랐다. 코로나19 탓에 북토크가 여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동네책방을 위한 민트색 표지 한정판을 2500부 찍었다. 동네책방에서 이 책을 사고 인증샷을 올리면 추첨을 통해 구멍가게 그림이 그려진 접시를 주는 마케팅도 폈다. 그 결과 출간 보름도 안 돼 동네책방 한정판 2500부가 거의 소진됐다. “동네책방은 작은 출판사의 버팀목이에요. 전국 동네책방에서 초판 2000부를 소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양질의 책을 내는 출판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거든요. 이번에 (이 책이 동네책방에서만 2500부가 팔리면서) 그 가능성을 엿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멍가게’였기에 이같은 화학작용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서울에 있는 큰 출판사에서 내라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제 안에 갖고 있던 것을 이토록 잘 알아봐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이미경 작가) “이제는 유명한 작가로부터 책 내자는 제안을 받기도 해요. 하지만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면 함께 책을 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진심을 다하는 그림과 글이 아니었으면 이 책이 지금처럼 사랑받지는 못했을 거예요.”(정은영 대표)
정 대표의 말대로, 이 작가의 진심은 남다르다. ‘그림같은 ○○슈퍼를 담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조만간 들르겠습니다.’ 손 편지를 끼우고, 해당 가게가 등장하는 페이지를 찾아 포스트잇을 붙여 취재했던 모든 가게에 책을 보낸다. “저는 구멍가게 주인 어르신 덕분에 사랑도 받고 먹고살게 됐는데, 정작 그분들께 아무 도움을 못 준다는 게 그렇게 미안해요. 구멍가게가 쇠락하는 건 현실이지만 그 속도를 좀 늦추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요.”
이미경 작가가 다녀갔던 구멍가게 주인에게 보낸 편지. 이미경 작가 제공
커야 좋은 거고 중심이 곧 정답인 땅에서 ‘구멍가게’는 여전히 멸종위기다. 사라지는 속도도 심상찮다. 이 작가는 “책 나오자마자 인증샷을 찍으러 제주에 간 독자에게서 (가게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북토크와 강연으로 방문객을 끌어 모았던 동네책방도 코로나19 사태로 특히 타격이 컸다. 정 대표는 “부산에 ‘낭독서점 시집’이라는 책방이 폐업하려다가 저희 책 출간 소식을 듣고 설레 다시 문을 열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서 봤어요. 겨우 용기 내 다시 열었으니 <구멍가게…> 책을 우리 책방에서 사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런 말 쉽지 않았을 텐데…. 눈물이 났어요.”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라는 책 제목은 단순한 공지가 아니라 힘겨운 생존 신고이자, 살아남아달라는 염원이 담긴 말이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