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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라서, 비혼이라서… 기대 속에 갇힌 ‘큰딸들’

등록 2020-06-12 06:00수정 2020-06-12 16:40

“‘독박 간병’ 비혼 장녀…그러나 자신은 돌봄 받지 못해”
일본 개호소설 ‘장녀들’ 번역해 출간한 안지나 숙명여대 교수 인터뷰
“장녀에게만 바라는 무조건적 공감과 이해, 객관적으로 다시 봤으면”

장녀들
시노다 세츠코 지음, 안지나 옮김/이음·1만4800원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아내(엄마)는 가부장제 안에서 윤활유로 소비됩니다. 제사나 생일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면서 가족 간 관계를 원활하게 하죠. 그런데 이 윤활유 역할을 하던 엄마가 병들면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안지나(43) 숙명여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던진 이 물음은 <장녀들>을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엄마를 간병하는 짐을 홀로 떠안은 장녀들의 이야기 세 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나오키상을 받은 소설가 시노다 세츠코가 2013년 일본에서 펴냈고, 이를 안 교수가 옮긴 한국어판이 최근 나왔다.

책은 ‘집 지키는 딸’ ‘퍼스트레이디’ ‘미션’까지 세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돼 있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엄마를 간병하느라 일도 연애도 놓아버린 나오미, 당뇨병 합병증에 시달리면서도 비정상적으로 단것에 집착하는 엄마를 증오하며 돌보는 게이코,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도 고독사한 아빠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리코의 서사가 차례로 담겼다.

안 교수가 이 책을 발견한 건 2014년, 도쿄대에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 노년 문학을 연구할 때였다. 노인이 된 부모를 홀로 간병하는 ‘비혼’ 장녀들의 이야기가 1남1녀 중 ‘장녀’인 안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번역해 출판사에 기획안을 냈으나, 한일 외교 갈등으로 출간이 연기돼 올해 겨우 빛을 봤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장녀들은 모두 ‘비혼’ 상태예요. 형제 자매가 없는 것도 아닌데 ‘혼자이니 몸이 가볍다’는 이유로 병든 엄마의 간병을 도맡게 되죠. 늙은 부모를 돌보다보면 자연히 자신의 노후를 상상하게 되잖아요. 그러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과연 내가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줄까?’ 이 질문은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서는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화두라고 생각했어요.”

비혼 상태라는 이유로 돌봄을 떠안았지만 정작 비혼인 그들을 돌봐줄 사람은 없다. 비혼 자녀가 마주하는 ‘돌봄 절벽’이다. 돌봄 절벽은 곧 ‘개호소설’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호(간호)소설이란, 부모의 노환·질병으로 그 가족이 부담하게 되는 경제적·정신적·육체적 부담을 주요 소재로 다룬 작품을 말한다. “<장녀들>은 개호소설의 끝, 단절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입니다. 비혼이 늘어난다는 건 결국 ‘가족’이 끝났다는 것이고, 그건 (개호소설의 주요 소재인) 가족 돌봄이 끝났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장녀들>의 주인공은 이혼(‘집 지키는 딸’)했거나 결혼하지 않았다(‘퍼스트레이디’, ‘미션’). 번역가(‘집 지키는 딸’), 의사(‘미션’)라는 전문성 있는 직업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가부장제라는 자장을 벗어나 있던 주인공은 어머니의 발병 때문에 다시 가부장제 안으로 소환된다. “(주인공들은 비혼에 대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산다고만 생각했지 돌봄을 요구받을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이 점 때문에 저는 비혼을 고려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어요. 비혼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비혼에 어떤 리스크(risk·불확정 요소)가 있는지 인식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20대의 나’는 알지만 ‘50대의 나’까지는 모르니까요.”

가부장제에 다시 포섭된 장녀들을 기다리는 건 ‘독박 간병’이다. ‘집 지키는 딸’에서 주인공 나오미의 여동생은 “나는 시집가서 출가외인”이라며 엄마를 병원 한 번 모시고 간 적 없으면서도 나오미의 간병 방식을 사사건건 지적하고, ‘퍼스트레이디’ 게이코의 남동생 야스미는 열 번‘이나’ 엄마에게 디저트를 줄이고 운동하라고 설득했지만 소용 없었다며 엄마를 쉽게 포기해 버린다. ‘미션’의 주인공 요리코의 오빠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빠를 돌보는 일을 노골적으로 동생에게 떠넘기며 “늙은 부모를 내팽개칠 거냐”고 죄책감을 심어준다. 윤활유가 사라진 관계는 곧 녹슬고 만다. 비혼 장녀에게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정서적, 실질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안 교수가 “비혼을 결심한 사람일수록 가족 외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다.

소설 &lt;장녀들&gt;을 번역한 안지나 숙명여대 교수. 도쿄대에서 일본 노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노인이 된 부모를 홀로 간병하는 비혼 장녀들의 이야기에 매혹돼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소설 <장녀들>을 번역한 안지나 숙명여대 교수. 도쿄대에서 일본 노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노인이 된 부모를 홀로 간병하는 비혼 장녀들의 이야기에 매혹돼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엄마와 딸의 “섬뜩한 결합체로서의 모녀관계”를 포착한 점도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장녀들은 엄마라는 윤활유가 채 소화시키지 못한 찌꺼기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부여 받는다. ‘퍼스트레이디’의 장녀 게이코는 “철이 들락 말락 할 나이부터 자장가 대신 조부모를 향해 늘어 놓는 (엄마의) 원한을 들었지만” 엄마에게 ‘자식’은 남동생뿐이다. 신장을 이식 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처지인 엄마는 게이코에게 말한다. “누가 자식한테 그런 짓을 시키고 싶겠니… 네 거라면 괜찮지만. 너는 내 몸이나 마찬가지니까.” 엄마는 딸을 “사랑하는 아이”가 아니라 “틀림 없는 자신의 일부”로 보고 무조건적인 공감과 이해를 요구한다. 관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필요한 법이지만, 엄마와 딸은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기에 엄마는 딸을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딸은 동일시로 인해 자신이 소모되는 걸 알면서도 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 교수는 “아들에게는 입신양명을 바라지만 딸에게는 공감과 이해를 바라는 게 현실”이라며 “요즘 유행하는 ‘딸 바보’라는 말도 따지고보면 부모를 이해하고 기쁘게 하는 역할을 딸에게만 기대한다는 뜻이다. 부모들이 이 점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혼 장녀들은 ‘독박 간병’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장녀를 돌봄의 굴레 안에 가두는 건 결국 부모가 주었던 ‘애정’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게 있는데 자신은 그걸 돌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애정의 크기만큼 죄책감을 느끼죠. 이게 장녀의 마음에 지옥을 만드는 겁니다. 어렵겠지만 벗어나야 합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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