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화판
권윤덕 지음/돌베개·1만6000원
그림책 작가 권윤덕이 첫 에세이 <나의 작은 화판>을 펴냈다. 권 작가는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일컫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후보(2016)에 한국인 최초로 이름을 올린 1세대 그림책 작가다. 25년 동안 10권의 작품을 선보였고, 발표한 작품마다 호평받아 ‘그림책 작가들의 작가’로 불린다. 그러나 이 베테랑 작가에게도 ‘하얀 화판’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다. “선을 하나씩 그어가지만, 대부분은 망쳐 버린다. 망친 것 가운데 표현이 아름다운 어떤 단서라도 발견하면 그것을 토대로 다시 화판에 그려 나간다.” 책에는 절망 한 획, 희망 한 획 번갈아 가며 완성한 작가의 작품과 인생에 대한 숱한 탐색선(머릿속 구상을 종이에 옮기며 대략적으로 그어 보는 선)이 아름답게 얽혀 있다.
권윤덕 작가의 그림책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중 밑그림 일부. ⓒ돌베개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미대에 가겠다고 했으나 “여자가 그림 그리면 팔자 세진다”는 아버지 반대 때문에 엉뚱한 과에 진학했다. 결국 대학원에 진학해 디자인을 공부하고 지역 미술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미술 주변을 맴돌다가 한 그림책 작가와의 연이 이어져 그림책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그때가 이미 서른 중반이었다.
첫 그림책 <만희네 집>(1995)이 인기를 얻으면서 성공적으로 데뷔했으나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세 살 아들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베이징으로 그림을 배우러 떠나고, 돌아와선 그림 연습을 위해 그 아들에게 100원 주고 모델을 시켜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1998), <만희네 글자벌레 시리즈>(2000∼2002) 등을 발표한다.
권윤덕 작가가 펴낸 그림책 <일과 도구> 중 밑그림 일부. ⓒ돌베개
권윤덕 작가의 욕망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에서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로 확장되는 듯 보인다. 단적인 예가 다양한 노동의 세계를 그린 <일과 도구>(2008)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를 그린 <꽃할머니>(2010)이다. 이런 걸 왜 찍냐며 자신을 쫓아내던 구두 공장 사장이, “어린이들은 마트에 가서 돈만 주면 구두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들 모두 누군가 정성을 쏟아 만든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에 촬영 시간을 30분에서 5시간으로 연장해 준 일화 등이 담겨 있다. 작가는 “노동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 그 자체일지 모른다”고 썼다.
권윤덕 작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그린 <꽃할머니> 한 장면. 일본군의 얼굴을 그리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화선지에 먹으로 그렸다. ⓒ돌베개
<꽃할머니>는 2007년 한·중·일 그림책 작가의 공동작업으로 시작됐다. “전쟁과 여성, 인권의 문제가 한일 간의 문제로 좁혀지면서 반일감정을 부추길까”봐 한국군 성폭력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을 그리는 등 신중히 작업하고, 일본의 중2 교실에서 더미북을 보여주며 수위까지 점검했으나 일본 도신샤 출판사는 끝내 출판을 거부한다. 결국 이 책은 국내 출판(2010) 8년 뒤인 2018년 4월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던 날 일본에서 출간된다. 작가가 용기 내 그은 탐색선으로 이어진 드로잉 삽화가 곳곳에 있어 어른을 위한 그림책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권윤덕 작가의 첫 그림책 <만희네 집> 밑그림. ⓒ돌베개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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