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넷판 ‘칸트 전집’을 번역해온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유작집 가운데 일부를 <유작 Ⅰ.1>로 번역해 내놓았다. 칸트 유작 가운데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칸트 유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칸트는 생의 말기인 1796년부터 1803년 사이에 방대한 분량의 정리되지 않은 초고를 남겼다. 이 초고 더미는 칸트 연구자들의 손을 거쳐 모두 열세 묶음으로 묶였고, ‘베를린 학술원판 전집’의 21~22권에 수록됐다. 이 유작 가운데 앞의 세 묶음이 이번에 한국어로 옮겨졌다.
한국어판 칸트 유작의 특징은 독일어 원문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실었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 다른 나라에서 나온 칸트 전집에는 유작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유작을 따로 출간하더라도 원문의 핵심만 간추려 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작에는 같은 주제를 사소한 변화만 주어가며 반복하는 경우가 많고, 중간 중간 칸트의 신상 잡기나 두서없는 생각의 흐름도 끼어들어 있다. 가령 초월철학(선험철학)과 형이상학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중에 난데없이 “멜론은 오늘 겐시헨 교수와 함께 먹어야 한다”는 문장이 나타나는 식이다. 한국어판은 이런 문장들도 남김없이 옮겼다. 이런 문장은 칸트 철학의 핵심과는 무관하지만, 칸트의 유명한 ‘점심 식탁’의 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칸트 유작이 진지한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은 이른바 ‘3대 비판서’를 쓰던 시기에서 극적으로 달라진 말년의 칸트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비판 철학’을 통해 라이프니츠나 볼프 같은 전시대의 형이상학을 파괴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 말년의 유고들에는 칸트 자신이 파괴한 형이상학이 ‘초월철학’을 통해 재구축되는 모습이 드러난다. 특히, 칸트가 이 유작에서 세우려고 애쓰는 것이 ‘자연 형이상학’인데, 그런 노력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들에서 물리학으로의 이행>이라는 저술 작업의 초고들에서 확인된다. 유작 원고의 대부분이 이 작업에 할당돼 있다. 앞 시기 ‘비판철학’에서는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배제했던 자연의 물리학적 근본 토대를 ‘에테르’ 또는 ‘열소’라는 이름으로 찾아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외의 모습 때문에 이 유작은 칸트 연구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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