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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계를 구하지 못해도 한 사람은 구할 수 있다

등록 2020-05-15 06:00수정 2020-05-15 09:41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후가는 유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현대문학(2020)
박현주 연재
박현주 연재

이따금 남다른 능력을 원할 때도 있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이리저리 치이지 않고 휙휙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다거나, 언제까지나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든다거나. 그러다가도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떠올린다. 능력이 커지면 그에 걸맞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쉬운 삶은 아닐 테니 됐다 싶기도 하다.

이사카 고타로의 <후가는 유가>는 아주 사소한 초능력이 있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에게 있는 초능력은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생일에만, 그것도 특정 시간대에만 쓸 수 있다. 네댓 살 때, 아버지에게 얻어맞던 후가를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유가는 자기도 모르게 샐러드유를 몸에 발랐고 순간적으로 둘의 몸이 바뀌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라면서 몸이 바뀌는 순간의 규칙들을 알아냈지만, 이 능력 자체로는 뭔가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 히어로처럼 세상을 구할 수도 없고, 부자가 될 수도 없다. 잔인한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초등학생을 구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도울 수도 있다, 아니, 두 사람은, 어쩌면 세 사람까지도.

사소한 초능력이 있는 형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후가는 유가>는 이사카 고타로의 다른 소설 <마왕>을 연상하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형제 중 한 명인 유가가 쌍둥이의 능력을 제보받은 피디(PD) 다카스키를 만나 자신들의 삶을 기술하는 내용이다. 거기까지만 봤을 때는 단순히 학대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며 살아간다는 따뜻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크든 작든 늘 반전을 숨겨놓고, 소설은 후반부에 들어 유가와 후가의 단단한 각오를 보여준다. 그 시점에서는 “누군가를 돕는 게 한가한 우리가 시간을 제일 즐겁게 보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사소한 힘이라고 해서 책임을 외면할 수 있을까? 자신조차 완전히 구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능력이라 해도 그걸로 타인은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후가는 유가>는 환상적인 설정 속에서 시민의 보편 의무를 묻는다. 아니, 의무가 아니라 그저 남을 돕는 게 즐겁고, 남이 고통받으면 나 또한 괴롭기에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에서 악인을 처리하는 건 슈퍼히어로만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큰 초능력이건 작은 초능력이건, 평범한 능력이건 우리는 그만큼의 깜냥으로 악에 맞서고 타인을 도울 수 있다. 한 사람만이라도, 어쩌면 두 사람을, 운 좋으면 세 사람은. 그 이상도. 떨어져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하는 이 시기에 새삼 와 닿는 깨달음이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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