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월간 ‘작은책’ 안건모 발행인
“버스 운전사로 일하던 1996년, <한겨레> 지면에 실린 월간 <작은책> 광고를 봤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라는 광고 문구가 마음에 확 와닿았죠. ‘지식인들만 글을 쓰는 게 아니구나, 노동자도 글을 쓸 수 있는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발행인을 맡아 발간 25돌 기념 특집호까지 만들었으니, 인생은 참 모를 일입니다. 하하하.”
지난 8일 서울 서교동 사무실에서 만난 월간 <작은책> 안건모(62) 발행인은 웃으며 말했다. 1995년 5월1일 노동절에 창간한 <작은책>은 최근 25돌을 맞았다. 일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 이야기를 담은 진보월간지로 자리잡은 <작은책>은 잡지 발간 외에도 글쓰기 모임 운영, 노동자 글모음 단행본 출간 등을 하며 노동자 글쓰기 문화의 저변을 넓혀왔다.
1995년 5월 1일 창간해 올해 25돌
다음달 지령 300호도 맞아 ‘특집’
“고비마다 구독운동한 독자들 덕분” 1996년 ‘한겨레’ 광고 보고 첫 투고
‘글쓰는 버스 운전사’로 기고 활동
“세상 참주인 ‘노동자 자신’ 깨달아”
최근 나온 5월호(통권 299호)에는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요즘 뭐 해먹고 삽니까’라는 주제로 쓴 독자들의 글을 100쪽에 걸쳐 담았다.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정훈, 농부 도상록, 독립영화 감독 류미례, 빈민운동가 최인기, 어린이집 교사 이현림, 숲해설가 신혜정 씨 등 25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안 발행인은 “<작은책>이 25년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독자들 덕분이니 그들을 창간 25돌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작은책>은 광고 수입 없이 오직 구독료로 운영한다. 현재 정기독자는 5천여명이고, 후원만 하는 이들도 500여명이나 된다. 주부, 교사가 가장 많고 연령층은 40∼50대 비중이 높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종이 잡지라니, 당연히 고난과 위기가 많았다. 특히 2002년엔 경영난 때문에 6~7월호를 연달아 내지 못했다. 그때 잡지를 살린 건, 구독자들이었다.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구독 영업을 해줬어요. 힘든 고비마다 독자의 힘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발행인 자신도 오랜 독자다. 그는 1996년 4월 잡지사에 글을 보냈다. “투고는 했지만 정작 글이 실릴 줄은 몰랐죠. 그런데 떡하니 잡지에 실린 것을 보고 정말 신났어요. 그 글 제목이 ‘요즘 시내버스 어떻습니까’였어요. 엄격하게 따지자면 잘 쓴 글은 아니었죠. 조사도 잘 모르고 띄어쓰기도 모르던 시절이었거든요.”
다행히 반응이 좋아 ‘안건모의 버스 일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1997년에는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란 글로 ‘전태일 문학상’도 받았다. ‘글 쓰는 버스기사’로 알려진 그는 2000년부터 1년간 <한겨레>에 ‘흐린 뒤 맑음’ 칼럼도 썼다.
글쓰기는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버스 운전을 하던 시절 제때 쉬지 못하고,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건 순전히 내가 못나서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열등감도 패배감도 컸죠. 하지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일터 이야기를 쓰면서 ‘세상의 참주인은 노동자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 땀의 가치와 소중함도 알게 됐어요. 저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그런 경험을 했어요. <작은책> 덕분이죠.”
25년째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에는 요즘도 15~16명의 사람들이 꾸준히 나온다. 25년 개근생인 이근제씨는 <작은책>에 글도 연재했고 2001년 ‘제10회 전태일 문학상’ 생활글 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분은 정년 퇴직하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면서 글을 계속 쓰고 계세요. 이런 분들의 글을 담은 <작은책>은 한국 노동자들의 커다란 역사예요.”
그는 2003년 5월부터 <작은책>의 ‘책임편집’이라는 직함을 걸고 제작에 참여했다. 낮에는 버스 기사로, 밤에는 잡지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1년 남짓 지난 2004년 말, 그는 27살 때부터 20년간 일했던 시내 버스회사를 그만두고 이듬해 <작은책> 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9월부터는 발행인이라는 직함을 걸고 지금까지 ‘출판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안씨는 5월호를 내고 숨돌릴 틈 없이 지령 300호인 6월호를 향해 “치열한 마감”을 하고 있다. “6월호에는 ‘노동자 글쓰기와 선전홍보’라는 주제로 특집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호에도 노동자들의 생활글을 실어야 하는데 마땅한 게 없네요. 결의문이나 호소문 등 주장하는 글은 많지만 가정이나 일터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기록한 노동자들의 글은 찾기 힘들어요. 노동자들이 이런 글을 예전보다 덜 쓰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25돌, 지령 300호를 동시에 맞은 <작은책>은 여러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 “초심으로 돌아갈” 각오이다. “요즘 독자들에게서 <작은책>이 노동자 월간지에서 ‘교양지’로 변해간다는 쓴소리를 들어요. 노동자들 생활글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죠. 초기에 잡지를 만들었을 때처럼 좀 더 일하는 사람들의 현장을 찾아다니고 그들의 글을 더 많이 실을 겁니다. 특히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룰 거예요. 그리고 ‘안 망하고 잘 하자’라는 각오로 매호 열심히 만들 겁니다.”
인터뷰 말미에, 안 발행인은 “현장에서 일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택시 운전을 해볼까 생각중이에요. 그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합니다. 이건 아직까진 계획일 뿐이지만요.(웃음)”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이 지난 8일 사무실에서 창간호(1995년 5월호·왼쪽)와 창간 25돌 특집호(2020년 5월호)를 나란히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허윤희 기자
다음달 지령 300호도 맞아 ‘특집’
“고비마다 구독운동한 독자들 덕분” 1996년 ‘한겨레’ 광고 보고 첫 투고
‘글쓰는 버스 운전사’로 기고 활동
“세상 참주인 ‘노동자 자신’ 깨달아”
1995년 3월 나온 <작은책> 창간준비호(왼쪽)와 그해 5월 발행한 <작은책> 창간호.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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