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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생을 완성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 고향 예천으로 돌아왔죠”

등록 2020-05-03 18:01수정 2020-05-04 02:34

[짬] 안도현 시인

고향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로 귀향한 안도현 시인이 지난 1일 새로 지은 집의 별채를 배경으로 웃음을 짓고 있다.
고향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로 귀향한 안도현 시인이 지난 1일 새로 지은 집의 별채를 배경으로 웃음을 짓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주인공인 은빛연어가 고향을 떠나 대양을 주유하다가 모천으로 돌아와 한살이를 마감하는 이야기다. 1996년에 나온 이 작품은 2017년에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 세계 10여개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타향을 떠돌다가 어머니 강 모천으로 회귀한 은빛연어를 닮으려는 것일까. 안도현 시인이 대학 시절부터 40년 동안 살아 왔던 전주와 전북을 떠나 지난 2월 말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돌아왔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의 시 ‘낙동강’의 무대인, 내성천을 낀 호명면 황지리 고향집 옆에 새로 집을 지어서 이사한 것이다. 지난 1일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시인의 새 거처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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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산천> 창간호 표지.

“오래 전부터 귀향을 계획했던 건 아닙니다. 지난해 우석대에서 단국대로 직장을 옮기면서 굳이 전주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거죠. 학교를 옮기기로 한 뒤부터 부쩍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전라도에서 오래 살았던데다 문재인 지지자인 걸 다들 아니까 주변에서는 걱정도 하더군요. 그렇지만 내 인생을 완성에 가까워지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귀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작품 주인공처럼 모천으로 회귀한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고향 예천의 자연과 역사, 문화를 알리는 잡지 <예천산천>을 창간한 것이다. 그가 편집인을 맡은 이 잡지의 발행 주체가 ‘모천’이라는 이름의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천 출신인 고전문학자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발행인을 맡았고, 예총 예천지회장인 권오휘 대창고 교사와 안상학·이종주 시인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예천과 붙어 있는 안동은 타지 사람들도 많이 아는데 예천이란 동네는 잘 모릅니다. 예천은 크기도 작지만 개발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온 농촌이죠. 그런데 그래서 그나마 보존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를 비롯해서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도 만나고, 남아 있는 문화유적들도 샅샅이 찾아볼 생각입니다. 격한 정치적 구호 말고 예천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겠죠.”

지난달에 나온 <예천산천> 창간호는 140쪽 분량의 잡지 판형 올컬러판으로 선을 보였다. ‘내성천’을 특집으로 삼았고 조선의 명재상 정탁과 국문학자 도남 조윤제, <대동운부군옥>과 <초간일기>의 지은이인 조선 선조대의 문신이자 학자 초간 권문해를 예천의 인물로 다루었다. 발행인 조현설 교수는 ‘전설 에세이’ 연재 첫 회분으로 대죽리 언총 전설을 소개했고, 편집위원인 안상학 시인과 이종주 시인도 각각 ‘옛날 옛날 예천 이야기’와 ‘예천 답사기’ 연재를 시작했다. 농촌유학과 귀농살이, 마을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등 지금의 삶에 밀착한 내용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40년 타향살이 접고 지난 2월 귀향

고향 알리는 ‘예천산천’ 잡지도 창간

140쪽 올컬러 첫 호 특집은 ‘내성천’

“예천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 낼 것”

지역 고교생 대상 시 워크숍도 구상

내년 봄 전국 시인들과 ‘예천시회’도

안도현 시인은 ‘창간사’에서 “늘그막에 하향(下鄕)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하는 상향(上鄕)을 꿈꾸고 있다”며 “<예천산천>은 예천의 전통과 역사를, 예천의 풍속과 문화를, 예천의 관광지와 음식을, 오늘날 예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40여년 만의 귀향을 꿈꾸면서 그가 계획했던 것은 잡지 창간 말고도 더 있다. 주민들과 정기적으로 시를 읽는 모임을 꾸리는 것과 지역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 창작 워크숍을 마련하는 것 등이 그 계획의 일부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아직 시작하지 못했는데, 하반기부터는 가능할 것으로 시인은 예상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전국의 시인 20~30명을 불러서 예천의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그들에게 예천에 관한 시를 쓰도록 부탁할 계획도 있습니다. 이름하여 ‘예천시회’인데, 내년 봄 진달래 필 무렵쯤 첫 번째 시회를 열 생각입니다.”

고향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 새로 지어 이사한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안도현 시인.
고향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 새로 지어 이사한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안도현 시인.

<예천산천>을 제외한 나머지 계획들을 일단 뒤로 미뤄 놓은 채 요즘 시인은 새로 지은 집의 조경과 정비 등 뒷작업에 한창이다. 집 앞 너른 마당에 잔디 깔기, 텃밭 가꾸기, 연못 만들기, 이끼정원 꾸미기, 나무와 화초 심고 가꾸기, 돌담 쌓기와 펜스 치기, 나무와 풀에 물 주기 등 손을 기다리는 일이 워낙 많아 차분히 앉아서 책 한 줄 읽지 못하고 있노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아침이면 여러 가지 새 소리가 잠을 깨우고, 이틀에 한 번은 고라니와 눈인사를 나누며, 틈 나는 대로 내성천변을 산책하는 등 그는 사실 ‘살아 있는 책’을 읽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가 예천에 와서 새로 쓴 미발표 시들은 그가 읽고 공부한 자연이라는 책의 가르침을 넉넉히 알게 한다.

“텅 빈, 연못도 아닌 허공이 마른입을 내밀고 얼마나 젖을 빨고 싶어하는지, 머잖아 좌우의 골짜기가 소란스럽게, 어느 때는 유치원생처럼 칭얼거리며 물소리를 내려보내고 싶어하는지 나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았지요 당신이 내게 괴어 오듯이 물이 오면 나는 못물이 어디서 왔는지 그가 살던 골짜기의 주소라도 귀띔해 달라고 보채기도 할 겁니다만”(‘연못을 들이다’ 부분)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했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꽃밭의 경계’ 부분)

시인이 귀향하던 무렵과 거의 때를 같이해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외손녀도 생겨서 경사가 겹쳤다. 환갑을 한 해 앞두고 귀향의 꿈을 이룬 그는 유년기 자신의 젖줄과도 같았던 내성천을 되살리는 일에도 매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내성천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한 모래 강입니다. 폭도 무척 넓고요. 그런데 상류에 영주댐이 생긴 이후로 모래사장이 풀밭으로 급속도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모래 지역이 많지요. 제 어릴 적에는 여름이면 매일 강변에 가서 살았어요. 여기 말로는 갱빈이라고 합니다. 내성천 옆에 사는 만큼 앞으로는 내성천을 복원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할 수 있는 일도 할 생각입니다.”

예천(경북)/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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