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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땅에서 쫓겨나, 새로운 땅을 찾아 떠도는 조선인들

등록 2020-05-01 06:01수정 2020-05-01 15:38

떠도는 땅

김숨 지음/은행나무·1만3500원

김숨의 소설 <떠도는 땅>은 1937년 극동 러시아 거주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을 다룬다. 지주의 착취에 시달리지 않고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을 찾아, 또는 일제의 핍박을 피해 와 연해주에 터 잡고 살던 조선인들은 제2의 고향이라 할 이곳에서도 다시 쫓겨나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야 했다.

280쪽 가까운 분량인 이 소설에서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마지막 일곱 쪽을 제한 나머지는 온전히 열차 안의 상황을 그린다. 소설은 주인을 알 수 없는 뒤엉킨 목소리들로 문을 열며, 전체적으로도 여느 소설들에 비해 지문보다 대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희곡을 닮았다.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나열하는 것을 주요한 서술 방식으로 삼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을 떠오르게도 한다.

“남의 밭에서 감자를 훔쳤어요. (…) 달 아래서, 별 아래서 훔친 감자가 내 동생들 목숨을 구했어요.” “팔려가는 가축도 우리만큼 서럽진 않을 거예요.” “여보, 당신보다 작고 늙은 남자가 울면서 땅을 팠어요. 열차에서 죽은 딸을 묻으려고요.”

발화자가 불분명한 이런 목소리들은 열차에 탄 조선인들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경험과 정서를 대변한다. 목소리의 주인이 특정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내용은 개별성과 특수성으로 떨어지지 않고 보편적 차원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렇듯 모호한 목소리들을 뚫고 소설 속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들리는 목소리도 있다. 보따리장사꾼 근석의 아내인 금실과 그 시어머니인 소덕의 목소리다. 근석은 조선인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지기 보름 전에 장사를 떠났고, 고부가 열차에 오를 때까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돌아올 남편을 생각해 금실은 집을 청소하고 감자를 삶아 놓고 물동이에 우물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

“나는 까마귀밥이 되든 말든 들판에 버려도 되지만 내가 입고 있는 저고리하고 치마는 벗겨서 꼭 챙겨 가져가야 한다.”

금실의 시어머니 소덕은 열차 안에서 며느리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소덕은 솜저고리와 솜치마 안쪽에 광목 조각으로 만든 주머니 마흔두 개를 달았거니와 그 안에는 보리, 팥, 조, 호박, 오이, 녹두, 가지, 상추, 배추, 옥수수, 땅콩, 메밀, 도라지, 무, 수박 등 온갖 곡식과 채소의 씨앗이 담겨 있었던 것.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신세가 된 농민의 슬픈 염원이 담긴 이 주머니 속 씨앗들은 그러나 끝내 새 땅에 뿌려지지 못한다.

작가 김숨.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작가 김숨.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가축 운반 열차에 가축보다 못한 처지로 구겨 넣어진 조선인들은 그 안에서 발을 뻗고 숨을 쉴 최소한의 공간을 두고 다투거나 챙겨 온 음식을 밤중에 몰래 혼자 먹기도 하지만, 자신의 치맛자락을 잘라 외간 남자의 장화에 난 구멍을 꿰매 주고 지난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힘과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상실의 절망과 분노를 새기며 결국 이들이 도착한 곳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수백 명이 죽은” 저주 받은 땅이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여정을 마친 사람들은 손톱이 빠지도록 땅을 파서 땅굴집을 짓고, 쓰레기통에서 감자껍질을 건져 끓여 먹으며 새로운 땅에 힘겹게 뿌리를 내린다. 열차 안에서 죽은 아기를 차 밖으로 던져야 했던 부부는 다시 새 생명을 잉태하고, 홀몸으로 근석의 아이를 낳은 금실은 처음부터 혼자였던 남자 인설과 새로운 가정을 꾸릴 가능성에 마음을 연다.

<한 명> <흐르는 편지>를 비롯해 일련의 ‘일본군 위안부’ 소설로 역사적 상처에 응답해 온 김숨이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라는 또 다른 역사적 아픔을 다룬 소설로 자신의 문학적 영토를 또 한 뼘 넓힌 작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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