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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입 닫은 목격자에서 말하는 고소인으로

등록 2020-04-24 06:00수정 2020-04-24 14:29

정숙하지 않으면 피해자 못 되는 여성, 정상 가장이면 가해자 안 되는 남성
전직 재판연구원이자 아동 성범죄 피해자 지은이 ‘기울어진 재판정’ 고발
호주 법조인 출신 작가 브리 리. 1년여 동안 재판연구원으로 일한 지은이는 현재 기고와 방송 출연을 통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확장하고, 성범죄 관련 입법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Paul harris
호주 법조인 출신 작가 브리 리. 1년여 동안 재판연구원으로 일한 지은이는 현재 기고와 방송 출연을 통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확장하고, 성범죄 관련 입법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Paul harris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
브리 리 지음, 송예슬 옮김/카라칼·1만8500원

“사건 당일 증인이 입고 있던 치마는 짧은 치마였습니다. 맞습니까?”

“오래 전 사건인데 왜 이제 와서 고소한 것이죠?”

“(당시 열세살이었다면서) 어떻게 남자의 발기된 성기와 그렇지 않은 성기에 대해 잘 알고 있나요?”

“(의사인 증인을 향해) 혹시 고소인이 복용 중인 약물에 피임약도 있었습니까?”

여성 인권이 취약한 어느 중동 국가의 법정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양성평등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옛날’ 얘기도 아니다. 불과 5년 전인 2015년, 호주의 법정에서 일상적으로 울려 퍼지던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거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성 격차 지수에서 호주는 우리보다 한참 앞에 있다. 지난해의 경우 호주는 44위, 우리나라는 108위였다. 우리나라 법정도 호주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론은 합리적이다.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이 호러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이 책은 호주의 전직 재판연구원(law clerk)이자 아동 성폭력 피해생존자인 브리 리가 썼다. 재판연구원은 판사의 조력자로, 각종 법적 자료를 챙기고, 재판을 연구하며, 배심원 명부를 관리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걸 차질 없이 굴러가게 하면서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연구원에게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재판에서 나오는 온갖 성차별적 발언에 동요하지 않고 일해야 한다.

총 2부로 구성된 책 1부에는 그가 소리 없이 지켜봤던 법정 내 성차별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그의 관찰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이렇다. ‘여성은 아주 작은 허점만 있어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은 큰 틀에서 문제만 없으면 가해자로 인정받지 않는다.’ 재판정에선 온갖 ‘슬럿 쉐이밍’(slut shaming)이 넘실댄다. 슬럿이란 정숙하지 않은 여성을 일컫는 은어. 여성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난하고 망신주는 행위가 슬럿 쉐이밍이다. 변호사는 피고인을 대신해 고소인(피해자)의 옷차림부터 남자관계, 정신 상태 등을 캐묻고 이 가운데 하나라도 ‘걸리면’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만약 내가 그날 밤 집에 돌아가다가 강간을 당했다면, 임플라논(이식 피임기구)은 내가 난잡한 성생활을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로 쓰였을 것이다.”

남성이 처한 상황은 정반대다. “피고인은 떳떳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섯 자녀를 두었고 25년간 국영 철도 기업에서 근무했습니다.” 평범한 가장이라는 변호사의 말이, 범죄 경력이 ‘빨간 줄(전과)’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사실이,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약물에 취해 운전하다 앞선 차량 운전자를 하반신 마비시킨 운전자는 유죄 선고를 받지만, 술에 취해 여성을 강간하고 ‘성관계에 동의한 줄 알았다’는 가해자는 무죄를 선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지은이는 ‘삶이 송두리째 바뀌기’는 마찬가지인데, 유독 성범죄 사건 가해자는 경미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재판에 참여하는 다수가 남성이라는 사실에도 좌절한다. “검사도 남자, 서기도 남자, (…) 판사도 남자(…) 이런 곳에서 강간 선고를 내려야 한다니.” 심지어는 12명의 배심원도 다수가 남자인데, “자신도 성범죄 피해자”라며 “배심원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하는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50여명의 배심원 후보 중에서 추첨을 통해 재판연구원이 12명을 확정하는데 거의 매번 성범죄 피해 여성이 여기 포함돼 ‘자신은 중립적일 수 없다’며 의견을 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다.

‘기울어진 재판’을 입 다물고 지켜보던 지은이는 허벅지를 손톱 칼로 긋고 먹는 족족 토한다. 지은이는 초등학교 때 집 뒤뜰에서 친오빠 친구 새뮤얼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그날의 기억이 성범죄 재판을 지켜볼 때마다 불쑥 떠올랐다. 2015년 가을 그는 침묵을 깨고 울먹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2부는 2년 동안 이어졌던 새뮤얼과의 법정 싸움이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용기를 쥐어짜 경찰에 신고했으나 담당자에게 전달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말해야 했던 일, 재판연구원으로 일한 ‘프로’임에도 갑작스러운 가해자의 연락에 공황상태에 빠져 음성 메시지를 삭제해버렸던 일화 등도 담았다. 새뮤얼은 처음엔 범행을 인정했지만, 후엔 ‘범행 시기’를 문제 삼으며 진술을 뒤엎고 사건을 재판까지 끌고 간다. 시간을 끌어 피해자를 포기하게 하는 가해자의 전형적 전략이다. 성범죄 재판에서 시간은 약자의 편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지은이는 “상대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모아 페미니스트라는 사실로 공격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른바 재피해자화는 나에게 성적 학대가 아닌 권력남용 형태로 나타났다. (…) 내 인생 전부를 그가 잡아먹고 있다는 느낌.”

고통 속에서도 지은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가해자의 이름 위에 ‘빨간 줄’을 긋기 위해서다. 보복이 아니라 예방 차원이다. “피고인이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고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빨간 줄이 훗날 피해자 여성이 ‘슬럿’으로 몰리는 걸 막아주는 방패가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불운하다고 할 수 있었다. 딱하게도 그는, 하필 계란껍질 두개골을 부숴버린 것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계란껍질 두개골’은 영미법에서 유명한 원칙이다. 타인의 머리를 가볍게 쳤는데 하필 그의 두개골이 계란껍질처럼 약해서 산산이 부서졌다면 ‘피해자가 약하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해자의 ‘가해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정도’만큼 처벌을 가하는 게 정의라는 뜻이다. 500쪽이 넘지만 번역이 매끄러워 술술 읽힌다. 책이 호러물로 끝나는지, 정의가 구현되는 짜릿한 법정물로 끝날지는 직접 확인하시길.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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