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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낯선 혁명가 김알렉산드라, 얼굴을 얻다

등록 2020-04-17 06:00수정 2020-04-17 09:34

한국 첫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의 일생 그린 그래픽노블
인종·국적·성별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 꿈꾼 ‘노동자의 대변인’…김금숙 작가 작품
김알렉산드라가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 모습. 서해문집 제공
김알렉산드라가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 모습. 서해문집 제공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서해문집·1만6000원

1918년 9월 러시아 군사재판정. 수의를 입고 피고석에 선 한 동양인 여성을 향해 재판관이 제안한다. “만일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이 여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요. (…) 만일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입니다.” 재판관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한 이 여성은, 최후의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는다.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가 재현한 김알렉산드라의 처형 장면이다. 김알렉산드라(본명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는 한국인 최초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노동 인권·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다. 그는 지난 2009년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조선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실존 인물이지만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금기’ 탓에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도, 소개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낯선 독립운동가에게 ‘얼굴’을 선사한 이는 김금숙 작가다. ‘한국 근현대사’와 ‘여성’에 주목해 <풀> <지슬> 같은 그래픽 노블을 선보여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김 작가는 역사 속 희미하게 이름만 남아 있던 김알렉산드라에게 동그란 얼굴과 흩뿌려진 주근깨를 입힌다. 이를 통해 독자가 이름부터 낯선 이 독립운동가의 곁에 잠시나마 친근하게 머무를 기회를 제공한다.

노동자의 통역가에서 대변자로

작가가 그려낸 김알렉산드라는 1885년 러시아제국 우수리스크의 한인 마을 시넬니코보에서 농민 출신 통역가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함경북도 경흥의 빈민 출신인 김두서는 중국 훈춘에서 소작농으로, 러시아에서는 막노동꾼으로 일하며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익혔다. 3개 국어를 하는 김두서를 찾는 곳은 많았다. 그중 하나가 시베리아 철도의 간선인 동청철도 건설현장이었다. 조선인·중국인이 노동자의 절대다수였던 이 현장에서 김두서는 러시아 관리자의 지시와 노동자의 요구사항을 통역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노동자의 말을 전한다고 작업환경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의 목숨은 “러시아제국 군대의 말(馬)보다도 하찮”았다. 일하다 다쳐도 병원 한 번 못 갔고, 사고로 죽으면 광야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이 모든 장면을 아버지 곁에서 지켜본 어린 김알렉산드라는 “굶주리고 억압받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이글거리는” 노동자의 분노를 조기 학습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김알렉산드라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노동자의 ‘입’이었던 통역가 아버지보다 진화해 노동자의 ‘입’은 물론 ‘팔’과 ‘다리’까지도 되어준 셈이다. 그는 스물아홉이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우랄산맥 서쪽 벌목현장인 페름으로 떠난다. 우랄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목재와 철강업이 발달했던 페름은 전쟁 물자를 만드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자 ‘인간 생지옥’이었다. 강제 동원되거나 취업 사기를 당해 그곳에 도착한 조선인과 중국인은 물론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의 포로병 들이 한데 섞여 하루 16시간 넘게 노동했다. 열에 하나는 신체 한 부분이 잘려나간 채로 일했고 쇠철조망 탓에 도망쳐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런 곳에 김알렉산드라는 ‘통역을 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간 것이다. 현장에서 통역가는 그나마 사람다운 대우를 받았지만, 그는 안락함을 스스로 포기하고 노동자 곁에 선다. 언어가 자유로운 덕에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를 달리 쓰는 각국 노동자들의 절규를 귀담아 들을 수 있었던 그는 이 소리를 조직해 우랄 노동자연맹을 만들어 파업을 이끈다.

이민자 2세가, 여성이, 그 어떤 조직의 지원 없이 이 일을 해냈다는 사실은 레닌 측근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당의 지원도 없이 노동자를 해방시킨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혁명가요.” 그렇게 신임을 얻은 김알렉산드라는 한인 최초 볼셰비키 당원이 되고,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 창당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조선을 해방하기 위해 반제국주의를 외치는 볼셰비키와 연대해야 한다고 판단한 이들은 한인사회당 적위군(혁명군)을 조직해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지만 결국 백위군(제정러시아를 지지하는 반혁명군)에 붙잡히고 만다. 총살 당하기 전 재판장은 “당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러시아 국사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죄를 뉘우치면 석방하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는 이 역시 단칼에 거부한다. “적위군과 함께 이 전쟁에 참여한 수백명의 조선인은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것이 조선을 해방에 이르게 해줄 것을 알기 때문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민자·여성은 권리가 없으니 처벌도 않겠다’는 권력의 달콤한 차별의 말 앞에서 ‘권리가 있으니 처벌을 받겠다’는 입장을 지켜낸 셈이다.

김금숙 작가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과감히 뛰어든 김알렉산드라의 일생을 그렸다. 서해문집 제공
김금숙 작가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과감히 뛰어든 김알렉산드라의 일생을 그렸다. 서해문집 제공

‘슈퍼 맘’을 거부했던 ‘쑤라’

김알렉산드라는 긴 이름 대신 주변인들에게 ‘쑤라’라고 불렸다. 삶을 대하는 ‘쑤라’의 태도 역시 그의 과업만큼이나 혁명적이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했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땐 주저하지 않고 핸들을 꺾었다. 알코올과 도박 중독으로 폭언을 일삼던 첫째 남편과 헤어졌고, 신부(神父​)인 둘째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남편에게 신부복을 벗지 말라고 만류했다. 인간의 영혼이 죽지 않는 게 쑤라에겐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 그 영혼이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아들을 뒀지만 육아 때문에 노동자의 곁을 떠나는 법은 없었다. 노동자의 대변인이자 독립운동가라는 정체성은 ‘엄마’보다 항상 앞섰다. 유모와 여동생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생지옥’ 우랄로 떠나기 전날 그는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어른은 천천히 돼도 괜찮아.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때를 기다려 성장해야 해. 너희가 살 세상은 지금 엄마가 사는 세상보다 좋은 세상이길. 우랄로 떠나는 것만이 너희의 미래를 구하는 길이다.” 한인사회당 적위군으로 내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나서며 그는 다짐한다. “내 심장 같은 두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서는 마음 안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나는 멈춰서도 안 되고, 멈출 수도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여도 오로지 앞으로 전진한다.”

성남문화재단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난해 9월 <다음 웹툰>에 연재한 작품으로, 문인이자 언론인인 정철훈 작가의 <소설 김알렉산드라>가 원작이다.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문화예술협의회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예술적 실천을 이룬 작품에 주는 레드어워드에서 ‘주목할 만한 기록’ 부문 수상작(2019년)으로 선정됐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김금숙 작가. /작가 제공
김금숙 작가. /작가 제공

“인종·민족 넘어 국제적 시각 갖춘 여성 독립운동가에 매혹됐죠”

김금숙 작가 인터뷰

“머리맡에 연필과 노트를 두고 잤어요. 자면서도 꿈을 꿀 정도였거든요.”

김금숙 작가는 <한겨레>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김알렉산드라에 빠져 지낸 1년을 이렇게 돌아봤다. 김 작가가 김알렉산드라를 만난 건 2018년 11월, 성남문화재단의 주선 덕분이었다. “독립운동가 33인의 삶을 웹툰으로 그려내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도헌 프로젝트 추진단장이 김알렉산드라를 추천했어요. 저랑 잘 맞을 것 같다면서요. 작품을 하기 전 그분을 알았냐고요? 전혀 몰랐죠.”

낯선 독립운동가의 삶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건 김알렉산드라와 자신의 여러 공통점 때문이었다. 러시아 이주 한인 2세 김알렉산드라와 프랑스에서 17년을 유학한 작가는 ‘여성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동양인은 외모적으로 (서양인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당연히 인종차별을 겪었을 것이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겁니다. 또 여성이잖아요. 닮은 점이 많아서 빠져들었어요.”

김알렉산드라의 곁으로 가기 위해 김 작가는 <소설 김알렉산드라> <김알렉산드라 평전>을 쓴 작가 정철훈을 인터뷰하고, 각종 논문을 발췌독하는 건 물론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등 생전 김알렉산드라가 좋아했던 문인의 글까지 찾아 읽었다. 다만, 김알렉산드라의 삶을 횡단하는 러시아 혁명사는 단서만 남겨 놓는 선에서 작업했다. 그는 “역사 교과서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러시아 역사를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며 “이 여성의 일생을 접한 독자가 스스로 질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두 아이까지 남겨두고 김알렉산드라를 전쟁터로 향하게 했던 추동력은 무엇일까. 작업하는 내내 김 작가를 사로잡았던 질문이다. 그는 “부르주아와 결혼해 소위 ‘잘 먹고 잘살던’ 여성이 어쩌다 혁명가의 삶에 뛰어들게 됐을까 궁금했다”며 “어릴 때 참혹했던 노동자의 현실을 지켜본 기억 때문에 본인만 윤택한 삶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작가가 김알렉산드라를 설명하기 위해 고른 수식어는 ‘시베리아의 딸’이다. 왜 조선이 아닌 ‘시베리아’인지, 또 왜 ‘엄마’가 아니고 ‘딸’인지 물었다. “인종과 민족을 넘어서 국제적 시각을 가진 독립운동가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조선의 딸’이라고 쓰지 않았어요. ‘엄마’보다는 ‘딸’이 김알렉산드라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살려준다고 봤습니다.”

김 작가는 요즘도 옛날 방식으로 작업한다. 에이스리(A3) 용지에 연필로 스케치하고, 이 종이를 라이트 박스에 대고 붓과 먹으로 그림을 그린 뒤 고화질로 스캔한다. 검정 외에 어떤 색도 배제한 김 작가의 그림은 그가 천착하는 주제인 한국 근현대사와 어우러져 특유의 정서 ‘한’을 표현해낸다. 이렇게 작업한 결과물은 특히 나라 밖에서 호평을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작가의 전작 <풀>은 지난해 프랑스 진보 성향 일간지 <뤼마니테>가 선정하는 ‘제1회 뤼마니테 만화상’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영국 <가디언>과 미국 <뉴욕 타임스>에서 각각 2019년 최고의 그래픽노블, 최고의 만화로 선정됐다. 제주 4·3을 그린 <지슬> 또한 지난 2015년 프랑스에서 출간돼 뛰어난 여성 만화가에게 주는 ‘아르테미시아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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