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서울대 중문과 교수)이 1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이 본부장은 “뛰어난 후배들이 시대적 요인으로 교수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교수 선정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연구자의 역량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처음 도입하고, 선정 이후 업적 평가에서도 단행본 1권을 논문 3편으로 인정하는 등 학계와 출판계의 오랜 숙원이 반영된다. 20년 이상 지속해온 획일적 평가 시스템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셈인데, 교수 및 대학 평가에도 변화의 바람이 번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란 인문사회분야 연구자들이 단절 없이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연구재단이 선정하는 연구직을 말한다. 5년짜리 장기(A유형) 프로그램에 300명을 뽑아 1인당 연 4000만원을 지급하고, 1년짜리 단기(B유형) 프로그램은 3000명을 모집해 1인당 연 1400만원을 지원한다. 기존 학술연구교수제도(최대 3년)와 박사 후 국내연수(포닥, 1~2년), 시간강사지원 사업을 통합해 지원 기간과 금액, 모집 규모를 크게 늘린 것이다. 지원 기간은 장기(A유형) 4월3일부터 9일까지, 단기(B유형) 5월6일부터 12일까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선정할 때의 평가항목 및 배점이다. 장기 프로그램의 경우 기존에는 ‘연구 계획’(프로포절)의 배점이 100점 만점에 80점이어서 사실상 탈락 여부를 가름했다. 기존에도 5년에 3편 이상의 논문을 제출하게 돼 있었지만, 질적 평가는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연구자의 실제 역량을 평가하지 못하고, 통과될 법한, 무난한 ‘연구 계획’이 남발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올해부터는 연구 계획 배점이 40점으로 현저히 낮아지고, 대신 ‘연구 역량의 탁월성’ 항목이 배점 40점으로 새로 생겼다. 특히 이 가운데 20점은 ‘대표 업적의 우수성’으로, 대표 논문 1편에 대한 질적 평가가 치밀하게 이뤄진다. 논문 제출 기준은 5년에 3편 이상으로 전과 같지만, 기존에 없던 질적 평가가 도입되는 것이다.
장기 학술연구교수에 선정된 뒤 요구하는 업적 평가에서도 기존의 ‘양적 평가’를 넘어 학계와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제도를 손질했다. 5년간 연구업적(논문) 5편 이상을 제출해야 하는 ‘양적 의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연구 주제와 관련한 강의를 1회 이상 하도록 하고, 학술대회 발표를 2회 이상 하도록 했다. 특히 단행본 1권을 논문 3편으로 인정해 단행본 출간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학계 안에서만 통용되던 지식(논문)보다는 사회와의 적극적인 소통과 교감을 중시하는 인식의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 본부장은 이런 변화를 ‘인문사회 교육의 중요성’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비티에스(BTS)나 영화 <기생충>, 소설가 한강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그 밑바탕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문사회 교육이 있어요. 인문사회 교육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민주시민 교육의 기반도 결국 ‘학술 연구’에서 나오는 겁니다. 훌륭한 연구 결과가 많이 나오게 하고, 그것이 사회로 확산할 수 있도록 지원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저의 일이죠.” 대표 논문 1편에 대한 질적 평가 도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논문 몇 편을 제출하라는 식으로 양적 기준만 있었기 때문에 누가 정말 뛰어난 연구자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거든요. ‘인생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 업적 하나만을 제출하도록 하면, 그 논문이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높고,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서울대 중문과 교수인 그는 지난해 11월20일 본부장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학문후속세대 지원사업’의 변화에 깊이 관여했다. 전임 본부장이었던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와 머리를 맞대고 지원정책의 변화와 확장, 내실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서울대 인문학 연구기구들을 지원하는 인문학연구원 원장 및 부원장, 인문대학 기획부학장 등을 지내며 “기존 교수들보다 뛰어난 후배들이 시대적 요인으로 교수에 임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큰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연구교수 선정 사업이 특별한 대목은 이 밖에도 여럿 있다. 기존에는 반드시 대학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었는데,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하는 연구자가 많아지는 현실을 고려해 대학을 통하지 않고서도 신청할 수 있도록 예외를 열어 놨다. 또한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여성의 경우 업적 평가 기간을 3년 늘려 8년으로 정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담겼다.
이 본부장은 이번 지원정책의 변화에 교육부와 연구재단 담당자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호응했다고 밝혔다. 신뢰가 낮은 한국 사회 특성상 질적 평가가 쉽지 않고, 이를 제대로 하려면 여러 행정 절차나 관련 업무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도, “변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협조해줘 매우 고맙고 고무적”이라고 이 본부장은 말했다. “심사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심사위원을 3명에서 5명으로 늘리고 심사 기간도 늘렸어요.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죠. 그래도 신청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의미 있는 변화를 끌어내려면 첫해 흥행이 중요하거든요. 앞으로 단기 프로그램은 점차 줄여나가겠지만, 장기 프로그램은 해마다 300명씩 늘려 총 1500명이 됩니다.”
이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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