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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사학 개척자 이이화 선생 역사가 되어 떠나다

등록 2020-03-18 17:03수정 2020-03-19 02:45

‘한국사 이야기’ 등 100여권 저서와 수십편 논문 ‘역사 대중화’
민중사학 기틀 일구고 친일·독재 미화 세력과 싸운 학문적 투사
역사학자 이이화.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역사학자 이이화.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18일 오전 세상을 떠나 스스로 역사가 되었다. 향년 84.

그는 고졸 학력의 재야사학자였지만, 평생 100여권이 넘는 저서와 수십편의 논문으로 역사 대중화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름없는 장삼이사들의 역사를 발굴해 한국 민중사학의 기틀을 일군 개척자였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를 상대로 평생을 싸운 학문적 투사였다.

무엇보다 선생은 한국 민중사학의 동의어 같은 존재였다. 특히 한반도 빙하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 통사를 22권의 책으로 펴낸 <한국사 이야기>는 노비와 백정, 여성 등 소외받던 민중의 삶을 역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역작이었다. <한겨레>에 연재한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이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데 기여했고, 폭군으로 불렸던 광해군과, 역적이라 비난받았던 정여립·강홍립·정인홍 등을 재평가하는 등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학계의 인습과 선입견을 타파한 선구자였다.

고인은 2010년 10월부터 6개월간 연재한 <한겨레> ‘길을 찾아서-민중사 헤쳐온 야인’을 통해 파란만장 성장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민중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배경은 어릴 때 집을 나와 날품팔이를 전전해야 했던 길바닥 인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36년 대구 비산동에서 주역의 대가였던 아버지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7살 무렵부터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으나, 16살이 되도록 아버지가 정규교육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가출을 선택했다. 1년쯤 떠돌다 부산 영도에 있는 서울애린원(보육원)에 들어갔는데, 당시 중학교 입시문제집 <지능고사>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학구열이 넘쳤다고 한다. 18살 때 한영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육원장 아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다 보육원을 나오는 바람에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이후 여러 보육원과 학교를 드나들었지만, 그가 평생 받은 정규학교 졸업장은 광주고등학교 졸업장이 유일했다. 입학 때 이미 스무살이었던 그는 은단 장사와 여관 종업원 일을 하며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23살 때인 1958년 서라벌예술대(현 중앙대) 문예창작과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아버지 임종을 위해 그만둔 뒤, 서울대 배지를 달고 전국을 돌며 대학입시 문제집을 팔아 생계를 이었다. 1964년 새로 창간된 <불교시보> 기자로 입사할 때까지 그는 ‘아이스께끼’와 가루치약, 군밤 장사 등을 하며 거리의 삶을 살았다. 이 무렵부터 문학의 꿈을 접고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32살 때인 1967년 동아일보사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취직해 <동아연감> 편집 작업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신동아> 별책부록 ‘한국 고전 백선’을 만들며 천관우, 박종홍, 임창순 등 당대 유명 학자들과 교류했다. 이후 1974년까지 동아일보 조사부에서 임시직 및 촉탁직으로 기사 색인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때를 식민지 시대 역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기초를 다질 수 있는 ‘학사과정’으로 생각했다고 선생은 회고했다. 같은 시기 서울대 규장각에서 했던 ‘고전 해제 작업’은 박사과정으로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한문 실력이 밑바탕이 되었다.

역사 관련 글을 처음 발표한 것은 38살 때인 1973년이었다. <신동아>에 ‘신규식 평전’을 실은 데 이어, 같은 해 <창작과비평>에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허균과 개혁사상’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자 양성기관인 국역연수원 시험에 합격해 근무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한국사 연구를 시작했고, 1975년 <창작과비평>에 ‘북벌론의 사상적 검토’를 실어 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42살 때 순수 학술지인 <한국사연구>에 첫 논문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를 발표하며 학계에 공식 데뷔했고, 같은 해 민족문화추진회를 그만두고 1981년까지 다시 서울대 규장각에서 해제 작업과 편집에 열중했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첫 저서인 <허균의 생각>(뿌리깊은나무)을 출간했다.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전문위원으로 임용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에 참여했으나, 전두환 독재 정권에 부역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1년 만에 퇴사했다.

민중사학자로서 선생의 이력이 꽃피게 되는 중대한 계기는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이었다. 임헌영, 서중석, 박원순 등과 함께 세운 역사문제연구소는 그 뒤 역사 대중화의 산실이 됐고, 이듬해 창간한 <역사비평>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이때 만든 ‘19세기 민중운동사’ 모임은 ‘한국 근대 민중생활사’ 세미나 팀으로 이어졌고, 역사문제연구소의 역사기행과 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 모임으로 발전해 선생의 관련 연구에 초석 노릇을 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학술운동의 하나로 여러 연구단체를 망라한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부터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맞서 노구를 이끌고 싸웠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씨와 아들 이응일(영화감독)씨, 딸 응소씨가 있다. 빈소 서울대병원, 발인 21일 오전 10시, 장지 파주 동화경모공원이다. (02)2072-2010.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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