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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너무 빨리 옛것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등록 2020-03-09 18:52수정 2020-03-10 02:35

[짬] ‘한국학 1세대 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스위스 출신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 사진 도이힐러 교수 제공
스위스 출신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 사진 도이힐러 교수 제공

조직량(1927~66). 경북 영천의 양반가 후손으로 1960년 미 하버드대에서 조선 후기 대원군 시대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972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책으로도 나왔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 통역사로 일하다 미국 유학 기회를 잡은 그는 박사를 따고 독일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다 만 39살인 1966년 세상을 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1935~). 스위스 출신의 저명한 한국학 1세대 학자다. 그는 19세기 말 한국 외교사를 다룬 논문으로 1967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2000년까지 취리히대와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대(SOAS)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지금은 고향 취리히에 살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학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도이힐러 교수의 사진집 <추억의 기록> 표지. 사진 서울셀렉션 제공
도이힐러 교수의 사진집 <추억의 기록> 표지. 사진 서울셀렉션 제공

최근 사진집 <추억의 기록-50년 전 내가 만난 한국, 사진 속 순간들>(서울셀렉션)을 펴낸 도이힐러 교수를 지난 4일 이메일로 만났다.

책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하버드에서 보낸 첫해(1959년) 기말 논문을 쓰면서 어떤 중국 서적이 필요해 알아보니 조아무개씨가 그 책을 먼저 대출한 상태였다.” 그와 조직량 박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됐다. 그 우연은 그의 표현대로 “짧고 격렬한 결혼 생활”로 연결됐다. “60년대 초 한국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사건들이 언제나 우리의 어깨를 짓눌렀다. 남편은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열렬한 애국자였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불확실한 운명 때문에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이힐러 교수에게 ‘어깨를 짓눌렀던 일’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자 “그 당시를 생각하는 걸 피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박사 학위를 딴 1967년 한국에 와서 2년간 머물렀다. 남편 조 박사를 떠나 보낸 이듬해였다. 1973~75년에도 한국에 체류하며 연구했다. 대부분의 한국 생활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일성록> 등 한국 고문헌과 씨름하며 보냈지만 틈틈이 여행도 했다. 이번에 낸 사진집은 그 시절 찍은 사진 3천여 장 중에서 정선한 것이다. “집에서 사진을 보관하기 어려워 지난해 모두 취리히대 부속 민속박물관에 기증했어요.”

도이힐러 교수가 찍은 1960년대 경상도 시골 장터의 여성들. 모두 한복 차림이다.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가 찍은 1960년대 경상도 시골 장터의 여성들. 모두 한복 차림이다.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그는 자신의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눌렀죠. 50년의 세월이 흘러 보니 사진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네요. 이 낡은 이미지들이 한국에서조차 낯선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죠.”

영어와 한국어 대역 판인 사진집은 저자의 자평대로 지금은 보기 힘든 한국 고유의 의례와 풍속을 생생히 보여준다. 안택고사와 동제를 기록한 사진이 대표적이다. 그가 찾은 경상도의 한 양반집은 안주인 주재로 고사 전문가인 ‘봉사할매’를 불러 집안의 평안을 비는 안택고사를 수탉이 울 때까지 지냈다. 부엌에서 시작해 마루방과 안채, 사랑채 순으로 밤새 이어진 고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봉사할매가 잡귀를 쫓기 위해 마당에서 긴칼을 대문을 향해 던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광경은 봉사할매가 촬영을 불허해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1960년대 하버드대 ‘한국외교사’ 전공
영천 양반가 출신 조직량 박사와 결혼
66년 사별 뒤·70년대초 한국 머물며
안택고사·동제 등 풍습 3천여장 찍어

‘50년 전 내가 만난 한국…’ 사진집 펴내
“기품있던 시댁 여성들 일상 모습 추억”

그는 1975년 충북의 한 산골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치른 동제의 모습도 담아냈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례인 동제는 의식 전에 소까지 깨끗이 빗질하고 행사날엔 마을에 금줄까지 쳐 외부인 출입을 막았다. 그만큼 신성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철저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관들을 따라 동제 전 과정을 관찰했고 사진까지 찍었다. “여성인 저한테는 대단한 특권이었죠. 하버드대 박사이자 한문에 밝아서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아요.” 그가 퇴계의 신위를 모신 도산서원 사당과 시흥향교 대성전의 유교식 제례 봉행 모습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특권 덕이었다.

그는 60, 70년대 한국의 모습을 더 많이 담지 못한 게 많이 아쉽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동제가 신령의 힘을 믿지 않는 정부에 의해 많은 억압을 받았더군요. 제가 조선사를 전공해 한국이 발전하기 이전의 옛 모습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1990년대에 벌써 60, 70년대의 모습이 많이 없어졌어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빨리 옛 모습과 관습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도이힐러 교수가 1960년대 찍은 봉사할매의 안택고사 모습.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가 1960년대 찍은 봉사할매의 안택고사 모습.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가 1970년대 시누이와 함께 참석했던 시댁 계모임에서 찍은 경상도 양반가 여성들의 모습.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가 1970년대 시누이와 함께 참석했던 시댁 계모임에서 찍은 경상도 양반가 여성들의 모습.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의 시댁인 경상도 양반가 여성들이 계모임을 마친 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도이힐러 교수의 시댁인 경상도 양반가 여성들이 계모임을 마친 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Ethnographic Museum of the University of Zurich

그가 박사를 마치고 바로 한국을 찾은 데는 시댁 방문 목적도 있었다. 혼자 시댁을 찾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냐고 하자 아무 문제가 없었단다. “오래 전에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어요. 시댁을 가면 제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큰동서가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셨죠.” 그가 매우 사랑한 시누이와 계모임에 초대받아 참석하기도 했고 쌀 부대를 어깨에 메고 함께 절을 찾기도 했단다. 이런 일상의 순간에 찍힌 기품있는 여성들의 이미지가 사진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사진집엔 여성들이 계모임 뒤 다보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모습도 있다. “계모임 구성원이 모두 양반가 후손인 시댁의 여성 친척들이었죠. 정말 기품과 위엄이 있는 여성들이었어요. 탑을 도는 일은 마음을 맑게 하고, 친척끼리 모여 즐기는 날에 잘 어울리는 마무리였어요.”

1960년대 한국인들은 백인 여성의 카메라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시골에서는 카메라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멀리서 카메라를 구경하러 온 분들도 있었고요. 나이 많은 어떤 여자분은 카메라 안에 나쁜 귀신이 있다며 사진 찍는 걸 많이 싫어하셨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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