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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등록 2020-03-06 06:00수정 2020-03-06 10:23

미국 여성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시집
여성들의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노래
레즈비언의 사랑과 욕망 솔직히 그려
“결혼은 독신보다 더 외로워”
“우리는 이것을 꿈꿔왔다 모두의 삶”
“여성이 자유로워야 진짜 혁명이다”

공통 언어를 향한 꿈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허현숙 옮김/민음사·1만3000원

미국의 레즈비언 시인 겸 운동가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1978)이 민음사 세계시인선 37번째 권으로 번역돼 나왔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1953년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앨프리드 해스컬 콘래드와 결혼해 세 아들을 낳았으며, 시를 쓰고 강의를 하는 한편 남편과 함께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70년 남편과 별거를 시작했고 남편이 자살을 택하는 바람에 리치는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녀로 몰리기도 했다. 1976년부터는 자메이카 출신 여성 작가 미셸 클리프와 평생의 반려가 되어 같이 살았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쓴 작품을 모은 이 시집은 남성 지배 사회에서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여성의 자각과 싸움을 평이하면서도 강력한 언어로 노래한다.

“우리는 스스로 굶어 죽고/ 서로를 굶겨 죽인다, 우리는 잔뜩 겁에 질린다—/ 우리가 갈망하면서도 되기 두려워하는 어머니들처럼/ 우리의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도시에, 세상에 뿌리면,/ 그 분무액을 휘둘러/ 독과 기생충, 쥐 그리고 병원균을 파괴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굶주림’ 부분)

“그는 여성을 믿어. 하지만 그는 우리를 뜯어먹고 살지,/ 그들 모두가 그렇듯. 그의 인생 전체, 그의 예술은/ 여성의 보호를 받아. 우리 중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 / 결혼은 독신보다 더 외로워.”(‘파울라 베커가 클라라 베스토프에게’ 부분)

시 ‘굶주림’의 인용한 대목 바로 뒤에서 리치는 “세상을 먹여 살리겠다는 결정이야말로/ 진짜 결정이다. 어떤 혁명도/ 그것을 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여성이 자유로워야 함을 요구하므로”라며, 굶주림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빈곤과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의 자유와 해방이 선결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 각자 그녀 내면의 비명에 귀 기울이게 하는/ 길거리 저 너머 매 맞는 누군가의 비명”(‘의식의 기원과 역사’)이 엄연한 상황에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베커(1876~1907)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1878~1954)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한 ‘파울라 베커가…’는 남성 예술가에게 착취당하는 여성 예술가의 현실을 고발하며 여성 예술가의 독립과 연대를 촉구한다. “클라라, 우리 힘은 여전히/ 우리가 이야기 나누던 것들에 있어./ 삶과 죽음이 어떻게 서로의 손을 잡는지,/ 진리를 향한 투쟁, 죄에 맞서고자 했던 우리의 옛 맹세./ 그래서 나는 지금 새벽과 새로운 날이 오는 걸 느껴.”

미국의 레즈비언 시인 겸 운동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lt;공통 언어를 향한 꿈&gt;이 번역돼 나왔다. “두 여성이 함께하는 것은 어떤 문명도/ 쉽게 해 준 적 없는 과업”이라고 리치는 썼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미국의 레즈비언 시인 겸 운동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 번역돼 나왔다. “두 여성이 함께하는 것은 어떤 문명도/ 쉽게 해 준 적 없는 과업”이라고 리치는 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 ‘굶주림’은 에이드리언 리치와 가까웠던 흑인 여성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이 시에서 리치는 “나는 서양인의 피부로 산다,/ 나의 서구적 시각, 내가 통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에 찢기고 내던져진”이라며 백인 중산층이라는 자신의 인종적·계급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런 한계의 자각 위에서 “연결하려는/ 욕구.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의식의 기원과 역사’)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시집의 제목에 쓰인 ‘공통 언어’는 자신들의 경험과 꿈조차 남성의 입을 통해 발화되어야 했던 여성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선 의지를 담은 말이다. 1974년 7천미터급 레닌봉에서 목숨을 잃은 여성 등반대장의 목소리를 빌린 시 ‘엘비라 샤타예브를 위한 환상곡’에서 엘비라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우리를 파묻고 당신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우리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흘러 들어간다/ 미완의 것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 가능한 것 속으로”

이 시 뒷부분에는 엘비라의 일기 형식을 취한 대목도 나오는데, 그 글들에서 엘비라는 여성 등반대원들의 동지애와 연대를 당당하게 찬미한다.

“지금 우리는 준비되어 있고/ 우리 각자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결코 이처럼/ 사랑한 적 없다/ (…) / 우리는 이보다 덜한 것을 위해/ 안주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꿈꿔 왔다/ 우리 모두의 삶”

전체 3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의 제2부는 ‘스물한 편의 사랑 시’라는 제목 아래 숫자로만 구분된 시 스물한 편을 묶었다. 이 시들에서 리치는 처음으로 레즈비언으로서 성 정체성과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는 잠에서조차, 다른 목소리를 내고,/ 우리 육체는, 매우 흡사하지만, 아주 다르다/ 그리고 우리의 혈관을 통과하며 메아리치는 과거는/ 다른 언어, 다른 의미들로 채워져 있어—/ 비록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의 어떤 연대기 안에/ 그것이 새로운 의미로 기록될 수 있어도/ 우리는 같은 성의 두 연인이었고,/ 우리는 한 세대의 두 여성이었다.”(제12편 부분)

“내 입 안에서 생생하게 지칠 줄 모르며 춤추던 젖꼭지—/ 단호하고, 방어적이며, 나를 찾아내던, 나를 만지는 네 손길,/ 네 단단한 혀와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오래 너를 기다려 온 내 촉촉한 장미 동굴에/ 닿고 있어—어떤 일이 일어나든, 바로 이거야.”(제14편 하단 ‘번호 없는, 떠다니는 시’ 부분)

레즈비언의 사랑과 욕망을 노래하는 시들에서도 여성과 여성성의 가치를 구가하는 리치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높이 솟은 화산의 봉우리가 사실은 깊은 중핵과 분화구로 이루어졌다는 ‘발견’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과 사회적 본질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봉우리는 모두 분화구다. 이것이 화산을/ 영원히 그리고 역력하게 여성적인 것으로 만드는, 화산의 법칙./ 깊이가 없이는, 타오르는 중핵이 없이는 높이도 없다,/ 굳은 용암 위에서 우리의 짚신 바닥이 너덜너덜해질지라도.”(제11편 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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