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사랑하는 것
함정임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함정임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나와 올해로 등단 30년이 되었다. 그간 그는 소설집 아홉권과 장편 넷, 중편 한권을 냈고 십여권의 산문집과 동화, 번역서도 펴냈다. 그것도 출판사 편집 일에 이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며 거둔 소출이어서 작가의 성실성을 짐작할 만하다.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어쩌다 사람을,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
책에 수록된 단편 ‘영도’의 말미에 나오는 이 문장에서 소설집 제목이 왔다. 이 단편의 제목 ‘영도’뿐만이 아니라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유난히 특정 지명을 제목으로 삼은 사례가 많다. ‘용인’ ‘스페인 여행’ ‘해운대’ ‘디트로이트’ ‘몽소로’ 등이 그러하고, 구체적인 지명은 아니지만 ‘고원에서’ 역시 지리적 감각을 환기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작가 함정임 자신이 여행을 즐기고 여행자의 경험과 느낌을 탐하는 이라는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엉뚱한 곳에 깃드는 뜻밖의 삶이란 곧 여행자의 삶일 테다. 이번 소설집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우찬제에 따르면 여행자의 삶은 “예기치 않음, 불확정성, 가변성”을 그 속성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우연성과 가변성이 어디 여행과 여행자만의 몫이겠는가. 크게 보면 우리네 삶 자체가 우연성과 불확실성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게 아닐지. 삶이 곧 여행이라는 금언은 그런 점에서도 타당해 보인다.
등단 30주년을 맞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낸 작가 함정임. “멋모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삶과 소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롯이 한세상이다. 나는 다만, 빌려 썼을 뿐”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함정임 제공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은 마법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과 같다.”
이번에는 ‘영도’의 앞부분에서 인용한 이 문장은 모든 여행자의 설렘과 기대를 대변한다. 이 작품은 서울과 포르투, 리스본과 부산 영도를 오가는 숨가쁜 여정 위에서 전개된다. 한국의 출판 편집자 재인과 포르투갈의 파두 아티스트 조아나, 그리고 소설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두 여성을 연결해 준 한국 남자 기주의 삶이 때론 포개지고 때론 어긋나며 흘러간다. 영도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와 파두 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물결”치듯이.
이 소설에서 보이지 않는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서울에서 출판 편집자로 일하며 한국문학 전공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기주는 포르투로 떠나서는 요절한 소설가 K(케이)의 평전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K가 죽기 전 사년 간 부부로 살았”던 소설가 H(에이치)가 그동안 출간한 소설책 열두 권의 ‘작가의 말’을 유에스비 파일에 담아서는 한국으로 향하는 조아나를 통해 재인에게 건넨다.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소설 열두 권은 다름 아니라 함정임 자신의 책들이고, 그렇다면 소설가 K는 작고한 김소진(1963~1997)일 테다. 함정임과 김소진이 이 작품의 숨은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네 마음의 푸른 눈>에서 띄워 올린 푸른빛의 환각이 <곡두>에서는 헛것 같은 사람에게 내려앉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추모의 정으로 가득했다. 소설가 H가 이십오 년 동안 소설로 도달한 지점이었다.”
소설 속 재인이 H의 ‘작가의 말’을 차례로 읽으며 내린 평가다. 이것은 물론 재인이라는 허구적 인물을 통한 함정임 자신의 자기 결산 및 평가일 텐데, 자신의 소설 쓰기가 먼저 세상을 뜬 김소진을 향한 기억과 추모의 작업이었다는 뜻이겠다.
실제로 이번 소설집에서도 김소진의 그림자는 뚜렷하다. ‘너무 가까이 있다’와 ‘용인’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데, 이 소설들에서는 특히 아들의 시점에서 아버지 김소진을 회억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생부는 서른네 살 되던 해 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너무 가까이 있다’)라는 문장은 “십칠 년 전 여름에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용인’)라는 다른 작품 속 문장에 대한 답으로 맞춤하다. ‘용인’의 주인공 역시 김소진의 영어 이니셜과 같은 K로 표기되는데,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길 위에 있었다.
“K의 어머니가 언제부터 틈만 나면 짐을 꾸려서 멀리 떠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K는 캥거루 새끼처럼 어머니와 함께 움직였다. K는 자동차에서, 열차에서, 배에서, 비행기에서 아침과 밤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K는 흔들리며 나아가는 것들과 속도에 익숙했다.”
단편 ‘스페인 여행’은 실제로는 프랑스 파리의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을 배경으로 삼는다.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은 이곳에 방문 연구원으로 머무는 동안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한국을 다녀온다. 그곳의 지인에게는 스페인을 여행했노라 둘러대고.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그가 이청준의 <축제>와 카뮈의 <이방인>,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 이를 등장시킨 작품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장면은 그가 어쩔 수 없는 활자와 문학의 인간임을 알게 한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몇 편에는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의 실제 인물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떠나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이 책 ‘작가의 말’에서 함정임은 썼다. ‘스페인 여행’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이자 애도의 의례라면, ‘순간, 순간들’과 ‘순정의 영역’은 또 다른 가까운 어른들의 마지막 여정을 담았다. 수유리 감나무 집의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주인공인데, 제목으로 쓰인 “순간, 순간들”과 “(오)순정의 영역”은 그분들 삶의 ‘푼크툼’(주관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집약한 구절이라 하겠다. “황해도 해주에서 경기도 양주로, 양주에서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서울 수유리의 이 파란 대문 앞에 서기까지”(‘순간, 순간들’) 이들이 거쳐 온 여정은 삶 역시 여행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가변적이며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