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논문은 공유재” 21세기형 지식인운동 닻 올린다

등록 2020-02-21 05:00수정 2020-02-22 00:45

지식공유연대 4월 창립…학술논문 무료 이용 ‘오픈액세스’ 운동
‘양적 평가 위주의 논문 평가’ ‘우수학술지 제도’ 등에 문제제기도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지식공유연대 첫 워크숍에서 이 단체 공동의장인 박배균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교수가 ‘한국사회에서 지식공유운동의 현재적 의미와 전개 과정’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지식공유연대 첫 워크숍에서 이 단체 공동의장인 박배균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교수가 ‘한국사회에서 지식공유운동의 현재적 의미와 전개 과정’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시작은 미약했다. 지난해 5월 상허학회(한국 현대문학 연구 학술단체) 사무실에 국문학 관련 학회장과 편집위원 몇이 모였다. 디비피아(DBpia) 등 민간 논문서비스 업체가 새로 내민 계약서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예를 들어, 일단 논문이 출판되고 나면 논문을 쓴 저자조차 자신의 논문을 블로그나 소셜미디어 등에 올릴 수 없게 되거나, “저작물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품을 제작, 개량할 수 있다”는 등 업체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업적·독점적 조항들이 새로 생긴 터였다. 디비피아를 운영하는 누리미디어는 벌써 3년째 ‘지식의 대중화’라는 명목으로 ‘우수 논문’을 선정해 이를 무료로 공개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논문을 선별해서 ‘우수’의 상징 기호를 통해 유료 회원을 확보하는 상업적 기획이다. 마트의 무료 시식 코너와 비슷한 홍보와 선전 이벤트이다.”(박숙자 서강대 조교수)

문제의식은 들불처럼 번졌다. 상허학회 모임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사회과학 쪽 학회들과 독립연구자들이, 7월에는 문헌정보학 관련 학회들이 참여했다. 8월에는 ‘시민과 함께 하는 연구자의 집’이 가세하면서 공유재(코먼스)로서의 지식을 어떻게 생산하고 유통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오는 4월24일 창립총회를 여는 지식공유연대(새로운 학문 생산 체제와 지식 공유를 위한 학술단체와 연구자 연대)가 탄생한 사연이다. 현재 약 40여 학회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국문학 관련 5개 학회는 지식공유연대 창립과 동시에 오픈액세스(OA)에 돌입하기로 했다. 오픈액세스 운동은 논문의 저작권을 생산자인 연구자가 되찾아와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의 권리 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학술 논문은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논쟁과 비판, 인용을 거쳐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공유재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모든 시민이 이를 무료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다. 문헌정보학 관련 8개 학회는 지난 2018년 4월 민간디비업체와의 계약을 끊고 오픈액세스를 이미 실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별도의 지식공유 플랫폼을 마련하는 게 목표이지만, 당장의 대안으로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이 운영하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www.riss.k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국가과학기술정보센터(www.ndsl.kr) 등을 활용할 계획이다. 이들 사이트에서는 지금도 무료로 학술논문을 검색할 수 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지식공유연대 첫 워크숍에서는 민간디비업체와 계약을 해지했을 경우 생기는 여러 문제에 대한 실무적인 대책을 주로 논의했다. 계약 해지에 따라 민간디비업체가 제공했던 홈페이지가 사라질 예정이라거나, 이들이 저작권을 갖고 있는 논문을 활용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질의와 답변이 주를 이뤘다. 만주학회, 한국사고와표현학회, 한국리터러시학회, 한국고소설학회, 대중서사학회 등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의 학회장 등 관계자 70여명이 참석해 열띤 강의와 토론을 벌였다.

이 운동의 성패는 학술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한국연구재단과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들이 일선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에 얼마나 공감하고 호응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몇몇 단체와 학회들만으로는 전체 판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공공도서관마저 민간디비업체 서비스를 초기화면에 띄워놓고 사용을 권유하고 있는 무비판적인 현실도 중대한 걸림돌이다. 그래도 몇몇 공공기관은 관심과 성의를 보이고 있다. 이날 워크숍에는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관계자들이 참석해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학회들의 학회지 과월호를 디지털(피디에프)화하는 작업을 돕기로 했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오픈액세스와 관련한 기술과 노하우를 공유하기로 했다.

지식공유연대는 오픈액세스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학술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등 대학 사회와 연구자 문화 개혁 운동에도 나설 방침이다. 지난 1월에는 한국연구재단을 방문해 ‘양적 평가 위주의 논문 평가 정책’ 시정과 ‘우수학술지 제도’ 폐지 등을 건의하기도 했다.

지식공유연대 공동의장을 맡은 3인은 각각 다른 색채와 힘으로 단체를 이끌고 있다. ‘연구자의 집’ 운영위원으로 코먼스 운동을 해온 박배균 서울대 교수(민교협 공동의장), 오픈액세스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정경희 한성대 교수(한국기록관리학회지 편집위원장), 인문사회학자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해온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등이다. 천정환 공동의장은 “논문에 대한 양적 평가가 강화되면서 학회가 늘고 논문도 늘고 있지만, 학문적 질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며 “연구자들이 파편화되어 각자도생하고 있는 문화, 연구자 착취 구조를 개혁하고, 공공성을 증진하는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숙자 서강대 조교수(대중서사학회장)는 “강사법(개정 고등교육법)에 따라 거리로 내몰린 시간강사들이나 비정규·독립 연구자들까지 포괄하는 넓은 형태의 21세기형 지식인 운동”이라고 지식공유연대를 소개했다. 이들이 20년 이상 지속된 신자유주의적 대학 평가와 경쟁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사진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