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라진 것들의 미래>, <모든 것의 처음, 신화> 두 권을 잇따라 펴낸 제주도 문화예술 전문가 한진오 작가. 사진 허호준 기자
“제주도를 1만8천여 신들의 고향이라고 하듯이 섬사람들은 곳곳에 신성을 부여해 삶의 의지처로 삼았고, 신들은 저마다 신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화는 의례의 극본 노릇을 하며 제주 특유의 굿을 탄생시켰습니다. 제주 신화가 지닌 비유와 비약은 현실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의 방법이며, 그 이면에는 치열한 현실 고발과 현실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제주도의 신화와 굿을 중심에 두고 문학과 음악, 연극, 미디어아트 등 전방위적 예술활동을 벌여온 한진오(52) 작가가 최근 4개월 사이에 제주의 신화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한그루)와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걷는사람) 등 2권의 책을 잇달아 펴냈다.
대학 탈춤반 광대로 시작 굿판으로
영등굿 전수자·다큐멘터리 감독도
‘제주 개발’ 비판한 뮤비 래퍼이기도
연구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 출간
“삶의 돌파구 ‘주술적 사실주의’ 낳아”
담론집 <모든 것의 처음, 신화> 표지. 한그루 제공
한씨가 굿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여년 전 대학에 다닐 때부터였다. 탈춤반 활동을 하다가 졸업 뒤 풍물과 마당극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풍물과 탈춤 등 전통 예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고향 제주의 전통에 궁금증을 갖게 됐어요. 자연히 어릴 때부터 보아온 굿이 제주 문화의 본령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굿을 공부해보기로 한 한씨는 지난 1996년 제주 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 전수자로 들어가 2014년까지 굿을 배웠다. 굿이 좋았고 굿에 미쳐 살았다고 한다. ‘심방(무당)이 될 팔자’라는 말도 들었다.
한씨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광대이자 작가이며, 제주굿 연구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등 다양하다.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연출상(2005), 1만8천여신을 활용한 스토리 텔링 전국공모전 대상(2008), 한국방송대상 지역 다큐멘터리 라디오 부문 작품상(2011) 등을 받은 실력파다.
그의 활동은 문화예술판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과 제2공항 반대투쟁, 비자림로 확장 반대 등 주민들의 삶이 파괴되는 현장은 언제나 그의 활동 무대가 됐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서는 랩으로 제주 개발의 문제를 신랄하게 고발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 10여년 동안 민속학적 이론 연구를 하고 창작 현장으로 돌아온 한씨는 “신화는 당연히 굿에서 생성되는 의례의 산물이다. 굿을 배우고 연구하는 사이 자연히 그것의 기초인 신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한씨는 “제주사람들은 거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 양식과 생업 기술을 고안해냈고, 자연과 인문이 공생하는 생태적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런 철학의 기준이며 교과서가 신화이다. 신화는 오랜 세월 제주사람들이 겪어온 심성사의 반영물이자 세계관의 기준점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에게 신화는 제주의 정체성을 형성시킨 고갱이이며 한편으로는 그 결과물이기도 하다.
최근 펴낸 <사라진 것들의 미래>에는 한씨가 지난 10여년 동안 극작가 활동을 하면서 써온 5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유배지로서의 제주 역사와 4·3항쟁, 환경파괴 등 난개발의 문제를 다뤘다. 이 가운데 미발표 작품인 ‘사라진 것들의 미래’는 난개발로 위기에 처한 제주의 모습을 신화적인 비유의 방식으로 고발했다.
희곡집 <사라진 것들의 미래> 표지. 사진 걷는사람 제공
한씨는 “5편의 극본에는 광대로서의 소명이 관통하고 있다. 더불어 제주사람의 숙명이기도 한 나의 모든 작업은 ‘주술적 사실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척박한 자연환경과 정치적 변방이라는 삶의 조건이 제주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현실의 돌파구를 주술에서 찾게 했다”고 진단했다.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가상의 이야기나 신화로 그리는 ‘마술적 사실주의’를 한씨는 “‘마술’이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오락적이고 환상적인 면만 부각될 것 같은 우려 때문에 ‘주술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펴낸 <모든 것의 처음, 신화>에는 그의 신화에 대한 통찰이 스며있다. 한씨는 이 책을 ‘길게 쓴 대자보이며, 신화에 관심 두는 예술가들을 위한 가이드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주도 굿을 통해 예술과 주술의 관계를 다루고, 제주도 무속에 나타나는 돌 숭배의 양상과 의미, 제주의 무속과 신화를 통한 정체성을 탐문했다.
제주도의 문화예술판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계획을 물어봤다. “제주의 역사와 신화의 보물상자인 굿을 주제로 삼은 작업을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올해는 굿과 4·3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이 중요합니다. 또 음악, 연극, 무용, 미술,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공동 작업하는 ‘거룩함의 거룩함’이라는 탈장르 작품을 연출할 예정입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