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에이도스·2만5000원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리스트 카터)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에리코 로)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위베르 망시옹) 등 지금까지 한국에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를 다룬 감동적인 책들이 적지 않게 번역되었다. 하지만 토착민의 통찰에다 겸손한 과학자의 언어를 더해 뭇 생명과 인간의 상호 의존관계를 힘있게 풀어내는 책은 많지 않다. <향모를 땋으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의 식물학자이자 작가인 지은이 로빈 월 키머러가 자신의 과학적 훈련에 토착적 세계관을 얹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 독특한 성격의 에세이다. 미국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부족의 신화, 역사, 문화를 복원하고 서구 근대적 학문체계 안에서 수립된 식물학적 지식을 섬세하게 땋아내려 문학적인 비유와 상징이 책 속에 흐드러진다. 책은 근대화의 반대 방향으로 계몽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는데, 잃어버린 인류의 영성을 복원함으로써 지금의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 경제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경제관과 인간-세상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하우데노사우니(긴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 연맹. 다섯 부족이 오논다가호 근처에서 연맹을 결성했다. 에이도스 제공
감동적인 실제 에피소드가 곳곳에 배치돼 있는데, 특히 여러 부족이 모인 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의 감사 연설 부분이 심금을 울린다. 그들은 학교에서 한 주를 시작하고 끝낼 때 국기에 대한 맹세가 아닌 ‘감사 연설’을 한다. 어머니 대지님, 물, 안개, 개울, 강, 바다, 물고기, 작물, 곡물, 약초, 열매, 나무, 독수리, 달님, 별님, 우레님, 조물주님까지 세상 만물에 올리는 긴긴 감사의 인사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혁명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다.” 감사를 하다 보면 결핍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감사에 뒤따르는 일은 “주면 돌려받는다”는 호혜다. 지은이는 자신을 키운 팔할이 ‘딸기’였다고 말한다. 그의 세계관은 놀랍게도 “선물이 발치에 한가득 뿌려져 있는 세상”이다. 딸기는 공짜였기 때문이다. 부족에게 땅은 정체성, 조상과의 연결, 보금자리, 약, 도서관, 먹여 살리는 모든 것의 원천이자 선물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땅을 소유물로, 부동산, 자본, 천연자원으로 여겼다. 연방정부는 인디언 이주 정책을 폈고, 모집책들은 피칸 나무 열매를 따던 아이들을 붙잡아 정부 기숙학교로 보냈다. 부족민들은 연방정부의 정책에 따라 군인들에 둘러싸여 총구의 위협 속에 수천 킬로미터에 걸친 ‘죽음의 길’을 가야만 했다. 그들은 땅에서 계속 쫓겨났고, 언어를 잃어버렸다. 자연과 나누던 상호 의존은 일방적 착취 관계로 탈바꿈했다.
향모. 이 향기 나는 풀은 아로마 허브의 일종인 듯한데 머리 땋듯 땋아 선물로 주거나 제의에 쓰고 바구니를 만들기도 한다. 부족 사람들은 향모를 “어머니 대지님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라 부르며 소중히 여긴다. 에이도스 제공
지은이는 부족의 언어를 잃고 과학을 배우며 그것이 세상에 참여하는 대단한 특권이자 좋은 도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고 돌아 세월이 흐른 뒤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부족의 연장자들은 나무에 인격을 부여했다. 옛날에 나무가 서로 대화를 나눴다고도 했다. 동화 같은 말이었지만 결국 그들이 옳았다. 나무들이 페로몬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제 과학적 지식과 토착의 지혜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안다. 지은이는 이야기야말로 땅과 인간의 부서진 관계를 치료하는 처방전이라고 말한다. “모든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으며 옛이야기의 실에서 새 이야기가 직조된다.”
부족의 옛이야기에는 ‘향모’(윙가슈크)가 등장한다. 이 향기 나는 풀은 아로마 허브의 일종인 듯한데 머리 땋듯 땋아 선물로 주거나 제의에 쓰고 바구니를 만들기도 한다. 부족 사람들은 향모를 “어머니 대지님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라 부르며 소중히 여긴다. 아메리카 대륙 탄생설화인 하늘여인 강림 이야기를 보면, 여인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그곳의 열매와 씨앗이 달린 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고 향모는 대지에서 가장 먼저 자라난 식물이었다. 지은이는 “식물을 섬기며 이용하면 우리 곁에 머물며 번성할 테지만, 무시하면 떠날 것”이라는 조상들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사례를 들려준다. 각자 필요한 만큼 “받드는 거둠”으로 자연의 선물을 당당하고 겸손하게 가져간 뒤 그 대가로 돌려주고 나누기만 한다면 각 개체가 번성하고, 각 개체의 번성은 전체의 번성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브루스 킹의 <하늘을 나는 순간>. 하늘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에이도스 제공
관계의 회복과 호혜성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가 ‘평화의 나무’ 이야기다. 먼 옛날 전쟁을 일삼던 다섯개 부족이 싸움을 멈추고 ‘위대한 평화의 법’에 따라 살기로 합의했다. 이 법은 오논다가호에서 탄생했고 호수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흰 연어가 잡히던 호수는 그러나 1970년에 수은 농도가 높아져 고기잡이가 금지되었고 각종 화학물질로 범벅되었다. 토착민 ‘오논다가 네이션’이 보금자리 소유권을 되찾는 소송을 2005년 제기했지만 2010년 연방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절망이야말로 오논다가호 바닥의 메틸수은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고 말한다. “복원은 효과적인 절망 해독제다.” 독성 유입이 중단된 호수는 이제 희망의 조짐을 나타내듯 조금씩 좋아져 용존 산소도 미량이나마 증가하고 있다. 복원의 주체는 식물이고, 인간은 이에 협력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주제 분류가 ‘과학’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강력한 생태, 영성, 철학 텍스트다. 두 딸의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가르치고 서구 백인 남성 중심 근대 과학의 영토 안에서 토착민 인디언 부족 출신 여성과학자로서 학계의 차가운 시선을 뚫고 자신의 독특한 가설을 증명하며 이론적 성취를 얻어가는 과정도 극적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며 대안적 삶의 상상과 실천을 자극하는 경제서로 읽을 만하다. “탐욕스러운 자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경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용기, 생명에 반하는 게 아니라 생명과 한편이 되는 경제를 요구할 용기”를 촉구하는 지은이의 목소리엔 힘과 얼이 서려 있다. ‘하늘여인’의 자손이란 자부심에 뿌리박은 것이겠지만 인간과 자연의 호혜적 관계를 끊어내었을 때 도래할 ‘재앙의 예언’을 인식한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제안한다. “이제 우리 차례다. 이제서야. 어머니 대지님을 위해 베풂을 열자.”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루돌프 쿠르츠가 1853년에 그린 <미주리 강변의 포타와토미 인디언>. 에이도스 제공
인디언들의 종교, 사회적 회합인 파우와우(Pow-Wow) 모습. 이 제의에서 향모를 태우기도 한다. 에이도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