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다니던 1993년 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교내 서점에서 압도적인 책을 발견했습니다. 세로 29㎝, 가로 21㎝ 커다란 판형에 검은색 표지, <엽서>(너른마당·199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의 원본 엽서를 실은 영인본.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며 내일은 또 내일의 오늘일 뿐이다. 智慧(지혜)의 女神(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夕陽(석양)에 날기 시작한다.” 첫 페이지엔 손에 얼굴을 파묻은 수인(囚人)의 모습과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신영복을 몰랐던 때였습니다. 절망의 깊이를 알 리 없었습니다. 그 글을 썼던 1969년,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심·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살얼음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책장을 계속 넘겼습니다. “겨울의 싸늘한 냉기 속에서 나는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봄을 기다린다.” “길을 걷다가 골목이 꺽(꺾)이는 길모퉁이 같은 데서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라. 거기 당신의 등 뒤에 당신을 지켜주는 손이 있다. 어머니의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靑丘會(청구회) 추억>에 이르자 그냥 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가격을 봤습니다. 1만2000원. 한 달 용돈이 20만원 좀 넘던 시절이었습니다. 침을 꼴깍 삼키고 지갑을 꺼냈습니다. 이후 너른마당이 문을 닫고 <엽서>도 절판됐습니다.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이 여럿이었습니다.
<신영복 평전>을 읽다가 <엽서>를 꺼내봅니다. 그동안 좋은 책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합니다. 그 추운 봄날 옆구리에 끼었던 <엽서>만큼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한 책은 여태 없었습니다.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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