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1
김시덕 지음/메디치미디어·2만원
“일본은 어떻게 그토록 이른 시간에 인터내셔널한 감각을 지닌 나라가 되었을까? 왜 아시아이면서도 아시아가 아닌 나라가 되었을까? 그 궁금증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총 5권에 이르는 역사서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에 관해 물으니 돌아온 답이었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HK) 교수가 쓴 <일본인 이야기1-전쟁과 바다>는 일본이 유럽 문명을 처음 맞닥뜨린 16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를 다루는 대작의 첫 번째 책이다. 이번 책에선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삼영걸’(三英傑)시대를 거쳐 에도시대로 진입하는 16~17세기 역사를 살폈다.
그는 이 100년이 일본의 글로벌 네트워크 편입에 중요한 앞 단계임에 의미를 두되, 여기엔 어떤 법칙이 작용하기보다는 ‘우연’의 요소가 짙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항해의 시대에서 제국주의가 본격 펼쳐지기 시작하는 격변기에 한·중·일 동북아 3국이 새로운 문명의 도전에 맞선 방식은 각자 달랐다. 당시 가장 개방적인 나라는 중국으로, 광저우·마카오 항구엔 서유럽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반면 조선은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일본은 그 중간쯤이었다. 1542년 포르투갈 출신 해적으로부터 조총 기술을 전수받아 나름의 무기혁명을 이뤘고, 1549년 예수회 신부가 도착한 이래 가톨릭 교세가 널리 번졌으며, 오다 노부나가는 지구의를 돌려보며 세계정복의 꿈을 꿨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한 일본인 노예 수출 등에 격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가톨릭 신부 추방령을 내리는 등 서구에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국내 정치 안정에 힘을 쏟는 대신 서양과의 교류는 절연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19세기 이후 일본은 근대국가로 탈바꿈했고, 조선과 만주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점령한다. 김시덕은 이어질 다음 책에서 이 원인을 규명할 예정이다.
총 5권으로 기획된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첫 권을 펴낸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HK) 교수가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시덕은 “일본이 초창기부터 아시아 패권을 거머쥐겠다는 굳건한 의지나 치밀한 전략을 가졌다기보다는 서구열강을 허덕거리며 좇아간 측면이 크다”며 “일본 근대화의 배경엔 우연과 행운의 요소가 짙다”고 말했다. 유럽세력이 본격적으로 다가온 16세기 중반 일본은 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통합으로 나아가는 시기였고, 이미 전국시대 다이묘(영주)들의 신무기 개발경쟁을 통해 축적된 군사적 토대가 있었다. 또한 일본에 처음 도착한 것은 무장집단이 아니라 선교사 그룹이었기 때문에 서구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바로 노출되지 않았다. 초기에 일본에 닻을 내린 국가가 당시 이미 국력이 쇠퇴해가던 포르투갈·스페인이라는 점도 행운이었다. 이후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네덜란드는 과학·의학 분야에선 선진국이었으나 군사력에선 영국에 밀리고 있었다. 김시덕은 만일 “만일 에도시대에 영국이나 러시아가 접근했다면 일본이 그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일찌감치 세계 광물시장에 끼어든 것도 운이 좋았다. 전 세계적 붐을 일으켰던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이 바닥을 드러내던 시기에 일본은 마침 조선에서 은제련기술(회취법)을 들여옴으로써 은 산출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행운의 여신에게 좌지우지되는 건 아니다. 독일인이 쓴 일본 역사서가 1801년에 번역돼 쇄국론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고, 네덜란드를 통해 의학과 지리학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1808년 영국과의 전투(페이튼호 사건)에서 패배하고 나자 외국 군대의 출몰이 잦았던 나가사키의 영주는 네덜란드어로 쓰인 군사 서적을 수집·번역해서 자체적으로 대포를 제작했다. ‘중화세계가 진지하게 외부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불교와 마르크스주의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국은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유럽에서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일본은 서양 문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한 것이다. 운을 거머쥐려는 노력과 리더십이 있었기에 우연은 행운이 됐다.
기존 일본 역사서와 이 책이 다른 점은 일본 내 가톨릭 역사에 상당 부분 할애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종교가 없다. 오해 마시라”고 전제한 뒤 “서양인들이 일본에 대해 쓴 기록에선 가톨릭에 대한 언급이 매우 많지만 일본 내 문헌과 연구에선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을 발견하고, 지워진 역사를 복원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해 오다 노부나가의 장손인 히데노부, 명문 유학자 집안의 기요하라 에다카타, 저명한 의학자 마나세 도산 등 최고 엘리트들이 가톨릭 신앙을 가졌을 만큼 가톨릭이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지만 신토와 불교의 영향 때문에 이들의 역사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가톨릭은 일본인이 처음으로 접한 서구문물이었다. 마치 부모님이 전부인 줄 알고 자랐던 아이가 학교에 가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듯, 그전까지는 중국이 전부였던 일본이 가톨릭을 통해 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됐다. 그 강렬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금지령 등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외부문물과 절연하고 살 순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등 일본과 오랜 인연을 쌓아온 김시덕은 최근 한·일갈등 문제에 대해 “일본에선 한때 낮춰봤던 한국의 국력 성장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인물처럼 바뀌지 않는 정치,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대재난, 고령화 문제 등으로 무력감이 번지고 있다”며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일본의 모습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아닌 다른 세계 즉 세계사적 관점에서 일본을 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