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 강경수 글·그림/그림책공작소·1만5000원
왼편에서 소녀가 걸어온다. 누군가를 떠올린듯 입가엔 엷은 미소가 퍼져 있다. 오른편에서 소년이 걸어온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개구쟁이 얼굴에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이 깃들어 있다. 서로가 스친 지점에서 소년은 소녀에게 쪽지를 건네고는 냅다 도망간다. 쪽지를 받아든 소녀의 몸은 뻣뻣하게 굳고 얼굴빛은 금세 발그레 물든다.
<처음, 사랑>은 두 아이의 마음과 표정에만 집중하게끔 다른 배경그림 없이 ‘사랑의 인트로’를 연다. 기억 저편의 푸릇한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나도 이런 느낌이야”라며 알쏭달쏭한 감정을 겪고 있는가. 어른 독자도 어린이 독자도 그림책과 행복한 동행에 나서보자. ‘처음,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첫사랑 이전의 떨림을, 그림책은 지면을 가로로 분할한 만화적 기법으로 그려낸다. 상단에는 소녀의 이야기, 하단에는 소년의 이야기가 들어찼다. 위쪽에는 토슈즈를 신은 ‘춤추는 소녀’의 순수한 기쁨이 펼쳐진다. 세상이란 무대에는 소녀만 있는 것처럼, 잡다한 것들은 생략된 여백으로 사랑의 표정을 돋운다.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제멋대로 통통 튀는 소녀의 발끝은 자유를 느끼며 날아오른다.
하단의 소년의 이야기는 만화적 구성으로 그려졌는데, 감정결이 섬세한 여자아이와는 다른 남자아이의 표현방식을 잘 보여준다. 쪽지를 건네고 달려간 곳은 소시지 가게. “요즘 야구는 어때?” “출루율이 아주 좋아졌거든요.” 가게 아저씨와의 말풍선 대화를 통해 소년의 내밀한 감정은 우회하며 전달된다. 배경묘사 또한 상단의 구성과 대비되게 세밀하다. 담벼락도 개도 나무도 소년의 ‘처음 사랑’을 눈치채도록 말이다.
강경수 작가는 2017년부터 첩보 추리 액션물 <코드네임 시리즈>(시공주니어)를 6권째 이어가며 어린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2011년에는 지구촌 아이들의 불행한 현실을 그린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 논픽션부문 라가치상을 받았다. 만화와 그림책의 경계를 넘나들며 따뜻한 감성코드로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강 작가는 이 책에도 ‘코드’를 심어놨다. 단서는 “춤을 출 거예요”라는 되새김말. 전작 <춤을 출 거예요>(2015)에서의 춤이 꿈을 향한 디딤발이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향한 몸짓이다.
편집자가 심어놓은 ‘코드’를 알아차리는 것도 책을 보는 묘미겠다. 민찬기 그림책공작소 편집발행인은 “비용이 많이 드는 홀로그램 표제로 디자인한 것과 출판사와 제목 각인효과가 있는 속표지를 없앤 것을 눈여겨봐달라”고 했다. 홀로그램 표제는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빛깔로 빛나는 저마다의 사랑을 나타내려 했고, 속표지 생략은 아이들의 예쁜 사랑의 몰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두 세상의 만남’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도록 우주로 안내한 작가의 상상력과 편집자의 코드가 딱 맞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그림 그림책공작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