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 전남대 교수는 “정부에서 공공기관에 어떤 사람을 앉힐 것이냐는 관심이 많은데, 정작 앉힌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의사결정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겨레와 진행한 대담에서 발언하는 성남/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인문사회학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문사회 분야를 ‘좌파적 학문’으로 보고 백안시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지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 인문사회학 분야의 쇠퇴를 막기 위한 국가적 조처가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연구재단에서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을 맡았던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는 이런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그는 이달 말로 임기가 끝나 다음달부터 다시 강단으로 돌아간다. 인문학자로서 일선에서 목격한 학술 정책의 현실은 어땠을까. 지난 8일 광주 전남대 연구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본부장으로 일하며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점을 듣고 싶다.
“우리나라엔 인문사회예술 분야 학문 정책이 없다. 정책을 기획하는 기관이 없고, 대변하는 사람도 전무하다. 과학기술 분야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처럼 천여명이 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이 있다. 과학기술인을 대변하는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위원회도 있다.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를 대변하는 사람은 정부 조직과 공공기관 내에 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내 자리도 원래 관리와 평가 역할만 하는 자리인데 두고 보기만 할 수 없어서 뭐라도 하려 했던 거다. 교육부에서도 인문사회 분야를 전담하는 직원은 많이 잡아도 3명뿐이다. 누군가 학술 정책의 문제점을 느끼고 대안을 내도 이를 고민해서 정책에 반영할 통로가 없다.
그러다 보니 예산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다. 2018년도 이공계 분야 순수 연구개발(R&D) 예산은 19조3748억원인데 인문사회 분야는 2933억원밖에 안 된다. 이공계 예산의 1.5%다. 이공계 예산은 최근 5년간 연평균 2.6%씩 늘어났는데 인문사회는 증가율이 0.2%밖에 안 됐다. 그러다 보니 박근혜 정부 때 이공계 대 인문사회의 비율이 1.6%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들어 더 줄어들었다. 이 정부가 끝날 때쯤 이 비율은 1.0%로 떨어질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문제는 여론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주제다 보니, 장관과 정치인들이 학술 정책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료들이 학술 정책에서 결정 권한을 쥐게 됐다. 관료들은 의사 결정자가 아니라 수행자일 뿐인데 말이다. 한국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권력기관이 세 곳 있다. 언론과 검경 그리고 관료다. 학술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정권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직결되지 않은 대부분의 문제를 관료들이 부당하게 지배하는 상황이다. 본부장으로 2년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사회 학술 분야에도 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위상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맞먹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적인 학술진흥청이든 사회부총리 직속의 학술진흥원이든 일단 기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이를 다음 정부 국정 과제에 넣어야 실현할 수 있다. 앞으로 다음 대선까지 여러 학술단체와 국공사립대학 학장단이 충분히 논의하고 의견을 수합해서 합의된 안을 만들어 요구해야 한다.”
-학문 후속 세대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4년제 대학에서 10년 사이(2007~17년) 자연계열 학과 수는 11.9% 늘어난 반면, 인문 계열 학과 수는 14.2% 줄었다. 인문사회계열 학문 후속 세대가 점점 줄어들어 이대로 가면 나중엔 중요한 고전이나 학술서를 번역할 사람이 없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학은 시장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다. 그래서 유럽에선 프랑스 고등학술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같은 국가기관에서 수천명씩 박사급 연구자들을 뽑아서 연구시킨다. 우리나라 이공계에도 이런 기관이 많다.
일단 학술연구교수 제도를 만들어 1천명을 먼저 국가에서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에게 연봉 6천만원씩 주면 600억원 정도 필요하다. 3년 동안 책을 쓰거나 학술서를 번역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갖췄다면 국가의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연구자라고 볼 수 있다. 이 방안을 가지고 국공립대학장들 여럿 모시고 국회의원, 기획재정부와 교육부 관료들 만나가면서 설득했다. 액수와 숫자가 줄긴 했지만, 일단 내년에 120억원을 들여서 연봉 4500만원씩 주는 학술연구교수 300명을 새로 뽑는다.”
-강사법 시행으로 강사들이 대량으로 해직되고 있는데.
“시간강사 통계도 정확한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학술정책이 허술하다. 최근에 연구재단에서 정책 과제로 학술생태계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담당 연구팀이 만나본 시간강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노와 포기가 지배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연구재단에서 시간강사들에게 연구비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신청자가 의외로 적다. 이유를 알아보니 지원 자격인 연구 실적이 부족하다는 거다. 강사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주당 15시간씩 강의를 하다 보니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고, 결국 지원도 못 받게 되는 악순환이 만들어진 것이다. 학술연구교수 같은 정책을 확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박구용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이 지난 4월1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 대강당에서 열린 ‘인문·사회분야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대표적인 국가 번역 사업인 명저번역지원사업 규모를 대폭 늘렸다고 들었다.
“정부에 열심히 이야기해서 지난해 5억6천만원이던 예산을 18억4800만원으로 3배 이상 늘려놨다. 지난해 신규 채택된 번역 과제가 19건이었는데 올해는 54개 과제로 대폭 증가했다. 그런데 예산상 18개 과제를 더 할 수 있는데도 한 해 만에 갑자기 늘어나니 지원자가 부족해서 사업비를 일부 반납한다. 사업비가 늘어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내년부터는 지원하는 번역자들도 증가할 것이라고 본다.
사업 방식에도 고쳐야 할 점들이 있었다. 매년 학계에서 추천을 받아 번역할 만한 지정도서 목록을 만들면, 그다음에 번역할 연구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 목록을 매년 새롭게 만들고, 지난 목록은 없애왔다는 거다. 내년부터는 한번 지정도서 목록에 오른 책은 계속 유지를 하자고 제안해놨다.
중요한 것은 번역 사업은 반드시 출판사 지원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출판 편집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아서, 번역한 걸 그대로 내는 인쇄 작업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면 좋은 번역이 나오기가 힘들다. 편집의 가치를 인정하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인공지능 같은 디지털 혁명으로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자가 필요 없어지는 현상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는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융복합 연구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인문학자가 없는데 과학자들끼리만 융복합 연구를 할 수 있나.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을 보라. 다들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않은 인문사회예술 분야 연구 수준을 갖췄다. 과학이나 경제 등 특정 분야만 발전한 나라는 세계무대에서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위성국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학술은 국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정신인 헌법의 가치를 확장하고, 시민들의 정신적 삶의 질을 고양하며, 인권과 주권 의식을 향상시키는 일은 인문사회 연구·교육자들만이 할 수 있다.”
광주/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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