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잘사는 나라 스웨덴-노동과 자본, 상생의 길을 찾다
조돈문 지음/사회평론아카데미·2만5000원
노회찬재단 이사장,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공동대표,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상임대표… 조돈문 전 가톨릭대 교수(사회학과)가 한국의 진보적 노동 연구와 활동에서 맡은 위치를 보여주는 직함들이다. 그가 지난달 31일 26년6개월 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다.
17일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만난 조 교수는 다방면의 왕성한 활동의 비결을 묻는 말에 “그동안 강의, 연구, 사회운동 다 좋아해서 즐겁게 할 수 있었죠” 라고 답했다. 그는 그동안 학교 수업에 붙들려서 다니지 못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여럿 세워뒀다. “올해 겨울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흰 두루미를 보러 가려 했는데 한일 관계 때문에 내년 1월에 남미에 가는 거로 대체했어요. 하하하.”
그는 자신의 연구 활동을 돌아보며 특히 공동 연구를 많이 기획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진보적 연구자들 가운데 저만큼 공동 편저 작업을 많이 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삼성이나 비정규직 같은 문제처럼 잘 연구하지 않는 주제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건, 이 문제에 대한 연구자를 배출해내는 좋은 방법입니다. 삼성은 굉장히 배타적으로 자료를 이용해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연구자를 찍어서 연구시키고 발표를 하니, 제대로 된 자료들이 공개되지 않죠. 그래서 연구자들이 연구하길 꺼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도 공동 연구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그 뒤로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하게 되는 거죠.”
교수직을 퇴임했다고 연구까지 은퇴한 것은 아니다. 퇴임에 맞춰 새 책 <함께 잘사는 나라 스웨덴>을 펴낸 것은 시작일 뿐이다. “성 평등과 여성노동에 관심이 생겨서 애초에 이번 책에 넣으려고 했는데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어요. 앞으론 한국의 상황도 연구하고 싶고, 관련 운동에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해온 삼성 노동 문제를 정리하는 작업,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작업 등 연구·집필 주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17일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만난 조돈문 노회찬재단 이사장은 “연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수사 같은 면이 있어요. 어떤 사회 현상이 있으면 그 원인이 뭘지 규명하는 건 탐정의 역할과도 비슷하거든요. 여기에 빨려 들어가면 다른 일은 거의 신경을 못 쓸 정도가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 사진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최근 진보 진영 내에서도 크게 논란이 벌어진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건에 관해 물었다. “조국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계급 불평등이 대물림되는지 보여줬죠. 강남으로 대표되는 상위 10%의 삶을 나머지 90%에 속한 지방대생들과 고졸 노동자들이 보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계급 불평등의 세습을 어떻게 깰 것인가가 의제가 되어야 하는데, 보수 야당은 개인을 공격하는 데만 초점을 맞춰서 제도 개혁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있잖아요. 정략적으로 이용만하고 실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수 야당이 바라는 것입니다. 분노로 끝내지 말고 비정규직 문제 등을 개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사회경제개혁을 위한 지식인선언네트워크’의 공동대표도 맡으며 문재인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에 경고음을 내는 일도 하고 있다. “문 정부가 애초에 공약으로 약속한 개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촛불로 탄생한 정부라면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핵심이 소득 주도 성장입니다. 해방 이후 바뀌지 않던 이윤 주도 성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대전환입니다. 하지만 이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마스터플랜과 정책 패키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
특히 그의 전공 분야인 노동정책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상시적 업무와 생명 안전 관련 업무는 정규직 직접 고용’,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내걸었죠. 이 두 가지 원칙은 집행만 해도 대부분 노동 문제가 해결될 정도입니다. 취임 직후엔 인천공항에서 ‘공공기관 비정규 제로’ 선언도 했죠. 이 선언이 본인에게 굉장한 부담이 될 것임에도 책임지고 하겠다는 모습에 당시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의 절반 이상이 자회사 고용 방식이에요. 예전에 케이티엑스 승무원도, 최근에 싸우고 있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도 이 방식이라 문제가 있던 건데 이 방식을 선택한 거죠. 게다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하면서도 탄력 근로제를 확대하면서 실제 노동시간 단축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도 산입 범위를 늘리고 있고요. 한마디로 원래 가겠다는 방향에서 유턴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가 기대를 다 접은 것은 아니다. “유턴했어도 다시 유턴할 수 있죠. 다른 정치인은 몰라도 문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봅니다. 본인도 여건이 된다면 공약들을 이행하고 싶어할 겁니다. 다음 총선이 마지막 기회라고 봅니다. 지금 상태로 가면 총선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할 거에요. 자유한국당만큼 무능한 야당은 그동안 없었을 정도니까요. 앞으로 대북 관계도 차츰 나아지고, 미-중 무역 분쟁이 잦아들면 문 대통령이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여건이 되리라고 봅니다.”
2015년 6월26일 낮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상임대표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가 제일모직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 고등법원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제일모직 조장희 부위원장의 복직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그는 현재 문재인 정부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민주노총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판단이다. “민주노총도 아쉽습니다. 민주노총이 촛불을 대변하는 힘 있는 집단이라고 한다면, 정부가 촛불 공약을 집행하도록 압박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를 두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 참여하지 않았죠. 사회적 대화 기구에 참여해 촛불 정부의 동반자로서 파격적인 대선 공약을 실행하는 데 힘을 합쳤어야 하는데, 득실을 따져 참여하지 않은 것부터 잘못됐습니다.”
민주노총이 단기적 시각에 갇히고 정규직 노조의 이익집단화되어 가는 모습 또한 걱정거리다. “이병철이나 이건희 회장은 세습을 염두에 두고 50년, 100년의 전망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위원장 3년 임기 동안 성과를 내는 것만 생각하지 중장기적 전망을 잘 만들지 않습니다. 앨버트로스와 벌새가 마라톤 경주를 하는 꼴이죠. 적어도 민주노총 집행부는 전체 노동계급 이해를 대변하고 중장기적 전망을 세워서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이런 전망이 금속노조나 현대차노조 같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익과 충돌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민주노총의 주도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민주노총 포함한 노동계가 산업 사이클로 발생하는 고용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면 정부와 기업, 노조가 구성한 거버넌스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구조조정이 눈 앞에 닥친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죠. 앞으로 민주노총은 지역이든 산업 단위든 일자리 정책을 결정하는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지면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일단 내년 총선까지 큰 욕심을 내지 말고, 이후에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거버넌스 구조를 만드는 데 전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10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 가톨릭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출범식에서 조돈문 상임대표(가운데) 등이 삼바 복장을 한채 삼바(삼성을 바꾸자) 춤을 추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여러 안 좋은 소식 중에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관련해 최근 나온 판결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는 그동안 삼성 내 노조 설립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고 현재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상임대표이기도 하다. “법원이 그동안 삼성에 불리한 판결을 내려온 적이 없었는데, 판결을 듣고는 놀랐습니다. 이제 삼성도 과거처럼 불법 비리에 의존해서 재벌 총수 일가의 지배 경영권을 독점 세습하는 행위를 그만두고, 노동 기본권을 존중하고 노조를 탄압하지 않는 정상 기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본인부터도 불법 비리에 얽히는 것을 더는 원하지 않을 거예요. 선대 이병철·이건희 회장 보다는 이 부회장이 훨씬 정상인 같고,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느끼는 사람으로 보이잖아요.”
그는 책을 내며 연구했던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처럼 삼성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재벌 가문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렌베리 가문은 경영 능력으로 후계자를 평가하고, 친족이 아니더라도 경영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가문이 가진 주식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재단을 통해 기초연구에 투자하며 사회로 환원하죠. 삼성이 했던 전환사채 헐값발행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웨덴의 노동전문가들을 만나서 이유를 물어보니 ‘발렌베리 가문은 돈보다는 사회적 존경을 더 중시한다’고 답하더라고요.”
역사적 맥락이 다른 스웨덴을 그대로 따라 할 순 없겠지만, 스웨덴의 여러 제도는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스웨덴은 세계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평등하고 공정합니다. 이는 스웨덴의 노동과 자본이 공존 상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노사 공동결정제와 노동조합대표 이사제라는 경제민주화제도가 확립되어 있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허용하되 고용안정성과 소득 안정성을 보존해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한국에서 가장 심한 갈등이 노동과 자본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노조조직률 10%밖에 안 되는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이 진전돼서 더 힘이 강해지면 자본도 노동의 말의 귀를 기울이고 공존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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