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공공성과 공공보건의료 김창엽 지음/한울아카데미·6만4000원
김창엽(59)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번 주에 경북 영양군을 다녀왔다. 1만7천명이 사는 이곳은 인구 과소 지역으로 분류된 곳이다. 병원이라고는 가정의학과 의사 한 명이 진료하는 의원급 병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웬만한 주민들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안동시의 종합병원으로 가거나, 4시간 거리인 서울을 찾는다. 김 교수가 이틀간 군수, 보건소장, 병원장, 주민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보건 의료 시스템이 너무 열악합니다. 그런데 재정 자립도도 전국 최하위권이고, 의료 문제를 민간이나 군에서나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김 교수가 소멸 위기에 놓인 인구 과소 지역을 다니기 시작한 지는 3~4년가량 됐다. 지금까지 10곳 정도 방문했다. 14일 <한겨레>와 만난 김 교수는 “공공의료를 연구하는 학자지만, 이게 책상에 앉아서 답이 나오는 연구가 아니더라고요. 공공성은 현실의 필요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라고 말했다.
평생 보건학을 연구해온 국내 보건정책의 권위자지만, 그에게 시각이 크게 바뀐 때가 있었다. “10여년 전에 제 시각이 공무원의 시각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에 의사와 병원이 얼마나 더 필요하다.’ 이런 효율성을 따지는 공리주의적 시각, 통치성의 시각으로 봐왔던 것이죠. 그때부터 사람 중심의 관점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 즉 ‘문재인 케어’ 2주년을 맞아 지난 7월2일 경기도 고양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에서 정책의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문가들이 의료전달체계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지조차 모릅니다. 대신 사람들이 시급하게 느끼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책이 바뀌어서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더 행복해지는지 등 시민들의 관점을 의식해서 다시 물어야 합니다.” 국가가 방치한 인구 감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무기력함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람 중심 관점을 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김 교수가 보기에 인구 감소 지역은 ‘고령화’와 ‘지방 소멸’이라는 점점 닥쳐오고 있는 두 거대한 위기를 동시에 목격할 수 있는 장소다.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라는 거대한 배는 이 두 암초를 향해 직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적 삶의 틀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수십년 만에 찾아오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시골 촌로들도 압니다. 즉, 모든 사람이 조금씩 희생할 생각은 다 하고 있다는 것이죠. 증세를 포함해 과감하게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문재인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유다. “이런 기회가 생겼는데도 문 정부에선 사람들이 반대할 거라면서 나서질 않습니다. 정치라는 게 뭡니까. 필요하다면 사람들을 설득해서 돌파해내는 게 정치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논의는 하지 않고, 피부에 와 닿지 않는 평화경제를 이야기합니다. 정치적 역량이 없는 겁니다.” 그가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6기 위원 임기를 1년여 남겨둔 채로 지난 1월 사퇴한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교수가 최근 내놓은 <건강의 공공성과 공공보건의료>는 보건의료 영역에서 공공성을 정의하고, 그 공공성의 형태를 여러 사례를 통해 살피는 책이다. “그동안 보건의료만이 아니라 교육, 복지, 주거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공공성을 이야기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공공성이 뭔지는 정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실천도 지리멸렬해졌던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공공성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의료공공성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지 묻는 발제문과 같은 책입니다.”
그동안 공공보건의료라고 하면 공공의료원의 활동 정도로 협소하게 인식됐다. “문재인 케어도 그 자체로는 필요한 정책이지만, 좁은 의미의 공공성에 기초해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용 부담을 덜어준다는 목적에만 한정된 것이죠. 하지만 의사들은 시장 논리에 따라 문재인 케어를 피해 새로운 비급여 진료를 찾아낼 겁니다. 지자체들은 영리병원을 다시 시도할 것이고, 기업들은 영리적 목적에서 원격의료를 도입하자고 계속 달려들 겁니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이런 문제에 대해 그는 “민주적 공공성에 기반을 둔 건강레짐”을 답변으로 내놓았다. 기존의 의료시스템보다 더 높고 넓은 차원의 ‘민주적 공공성을 확보한 건강레짐(체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어떤 한 체제의 성격은 국가-경제-사회 권력 간의 경쟁과 균형에 따라 결정된다. 이때 병원·제약회사 등 경제 권력이 아니라 시민사회·정치인 등 사회 권력이 체제를 지배할 때에야 ‘민주적 공공성을 확보한 건강레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시민들에게 어느 정도로 편익이 돌아왔냐는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 또한 시민들이 지배했느냐를 묻는 것이다. 국민을 대표해 국가가 병원의 이사진에 참여한다든지, 아니면 시민들이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직접 서비스 제공자가 되는 등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경제, 복지,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시장이 아닌 공공성에 입각한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지 못하면 미래 세대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겁니다. 이 시대의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책임지고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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