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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복지국가의 길 ‘노조 역량’ 절대적인 까닭

등록 2019-08-02 06:01수정 2019-08-02 21:07

사회학자 이철승 서강대 교수
노동-시민연대 작동 구조 분석
‘배태된 응집성’ 개념 중심으로
노조 지도자 ‘조율 능력’ 재조명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
-배태된 응집성과 복지국가의 정치사회학
이철승 지음, 박광호 옮김/후마니타스·2만5000원

한국 현대사를 말할 때 급속한 경제 발전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 또한 눈부신 발전을 이뤘음을 잊어선 안 된다. 노동운동이 전성기 시절에 발휘한 힘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1996~97년 총파업은 40년 만에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개발도상국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건강보험제도를 일궈냈다.

하지만 그 붕괴 또한 매우 극적이었다. 특히 노동자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사회정책으로 전환한 것은 충격이었다. 국민연금제도와 노동시장 규제가 국가와 자본이 추진한 축소 공세에 속절없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견고한 노동과 시민 연대 덕에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약 30년에 걸쳐 일어난 사회정책과 노동시장 정책의 극적인 확대와 축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어떤 노동운동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압력 속에서 핵심적인 제도를 지켜 낸 반면, 다른 노동운동은 그러지 못했는가? 이철승 서강대 교수(사회학과)가 쓴 <노동-시민 연대는 언제 작동하는가>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복지국가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는 모델을 개발하고, 그 모델을 통해 노동-시민 연대와 노조-정당 동맹이 복지국가를 확대 또는 축소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저서다. 특히, 한국의 사례를 통해 얻은 분석틀을 아르헨티나, 브라질, 대만으로 확대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 압력에 처한 다른 사회들에 상당한 함의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 시카고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던 2016년 영문으로 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은 먼저 가혹한 권위주의 시기였던 1970~80년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가지고 공장으로 들어간 ‘학출’ 노동운동가들에 주목한다. 노동 현장에서 새로운 혁명 자원을 일구기 위해 ‘하방’한 이들은 ‘87년 6월 항쟁’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1995년 민주노총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소련의 해체로 혁명 사상에 회의를 품은 이들은 공장을 나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치를 택한 일부는 2000년 민주노동당을 건설했고, 다른 이들은 보수정당 또는 중도 개혁 정당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온건한 개혁 활동가로 전향해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를 설립한다.

이철승 교수는 “2000년 민주노동당의 탄생은 1990년대에 노동운동 이론가들과 전략가들 사이에서 움텄던 이론적 기획이 극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선자 10명을 배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권영길 이수호 노회찬 등 10명의 당선자들이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이철승 교수는 “2000년 민주노동당의 탄생은 1990년대에 노동운동 이론가들과 전략가들 사이에서 움텄던 이론적 기획이 극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당선자 10명을 배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권영길 이수호 노회찬 등 10명의 당선자들이 당선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이런 상황을 분석하며 이 교수는 ‘배태된 응집성’(embedded cohesiveness) 개념을 제안한다. 배태성은 “노조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갖는 동원 역량과 정책 역량의 차원들”을, 응집성은 “노조가 (집권) 정당과의 관계에서 갖는 (선거 정치와 로비 정치에서의) 동원 역량과 정책 역량의 차원들”을 말한다. 즉, 노동운동가들이 시민사회로 가면서 노조와 시민사회의 배태성이 확보되고, 정치권으로 가면서는 노조와 정당의 응집성이 강화된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이 개념을 통해서 보면, 배태성과 응집성이 모두 확보되었을 때 노조는 보편적 사회정책 개혁을 이룰 공산이 가장 커진다. 이는 노조가 광범위한 시민사회 파트너들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노조가 사회적 기반을 넓힐수록 노조의 의제 역시 건강권, 환경권, 사회권, 인권 등으로 확장된다.

노동자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노동시장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바꾸는 모순적 상황은 산업 노동자 계급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 개발도상국 등에서 주로 관측된다. 노동자 기반 정당들은 탈산업화와 기술발전으로 인한 노조원 감소 등으로 지지 역량이 축소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에 사업가나 자영업자, 사무직 노동자 같은 중산층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시장주의적 개혁을 시행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에 깊이 배태된 노조가 있다면 폭넓은 연대를 동원해 복지국가에 대한 시장주의적 개혁에 온건한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고, 노동권에 대한 국가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

이런 배태된 응집성을 가장 잘 구축한 사례가 1990년대 의보연대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된 의료보험조합 통합 운동이었다. 의보연대회의는 의료 전문가, 시민단체, 노조 사이의 효율적 연계를 구축해 2000년대까지 진보와 보수 정부가 모두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민영화 보편적 건강보험 체제를 지켜냈다. 반면 같은 시기 노조가 허약했고 시민단체와의 연계도 조밀하지 못했던 연금 부문에서는 정부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런 배태된 응집성 접근법은 그동안 학계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노조 지도자들의 ‘조율 능력’을 새롭게 평가하게 한다. 이 교수는 운동의 성패가 “최상의 전략과 행동을 식별해 내고, 연합과 협상 파트너의 이해관계를 주의 깊게 고려할 수 있는 노조 지도자의 사회적, 제도적 조율 기술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민주노총의 역할과 참여정부의 노동 정책에 대한 평가는 중도-진보 진영 내부에서 아직까지도 논란이 뜨거운 문제다. 과거를 정치적 이해관계나 지지 여부에 따라 단선적으로 소비할 뿐인 현실에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차분히 복기해 ‘어떻게 하면 다시 더 잘 할 수 있을지’를 학문적으로 보여준 이 교수의 작업은 더 빛난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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