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수집 자료·희귀 시각물 풍부
해방 전까지 6500여종 발매 추정
판소리·대중음악 변화상 한눈에
“국가 차원에서 음향기록 관리해야”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 배연형 지음/지성사·10만원
“이전 없던 전어기(傳語機) 통이 새로 나왔으되, 각색 말과 기이한 풍류소리가 나는지라. 하 신기하기로 세상에 구경시키기를 위하야 농상공부 인가를 얻었사오니 많이들 와서 구경하시되, 어른은 백통(동)전 한 개오, 아해는 적동전 세 개오. 봉상시 건너 북물골 전어기 주인 고백.”(<제국신문> 1899년 3월13일)
배연형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이 10일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모아 놓은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유성기음반을 들어 보이고 있다. 유성기음반은 30회 정도만 음질이 유지되며, 쇠바늘도 1회용이다. 음반 바늘의 강도가 세면 음반이 빨리 닳아 음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서양 물건이로되 조선 귀신이 붙었다’는 유성기(留聲機)가 조선의 대중에 널리 알려진 때는 1899년 3월이다. 말소리가 녹음돼 있어 ‘전어기’라고 쓰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기록에는 축음기(蓄音機)라는 말이 많이 나타난다. 여러 신문에 유성기 소리를 들려주고 돈을 받는 집의 광고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만큼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는 뜻이다.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근대적인 속성을 지닌 대중적인 유행과 상업적인 유행을 이끌어낸 문화현상의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 유성기음반 문화사>는 손으로 핸들을 돌려 태엽을 감고 쇠바늘을 꽂아서 소리를 듣던 “한국 유성기음반의 모든 것”을 신문 등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음반 레이블에 있는 곡 이름과 연주자,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음반번호 등도 도표로 정리돼 있다. 40년간 유성기음반을 수집하고 연구해온 배연형(62)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은 “문헌학적 관점에서 유성기음반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한다. 유성기음반에 얽힌 시대상과 문화의 변천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희귀한 사진과 신문광고 등 시각물도 많아 무엇보다 자료로서 가치가 큰 책이다.
1899년 4월28일 <독립신문>에 실린 유성기집 광고. 지성사 제공
지난 10일 자료가 수북한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배 소장은 “1980년대 초 서울 청계천에서 유성기음반을 몇 장 샀는데,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고물 유성기도 하나 구입했었다.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판소리 소리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판소리 음반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게 나중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연구 대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전력을 다해 미친 듯이 유성기음반을 수집했다”고 말했다. 1989년 2월 한국의 첫 유성기음반을 손에 넣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906년 2월 “조선으로부터 한인오, 관기 최홍매, 외 3인을 오사카로 불러…” 출장녹음한 음반들이었다. 미국 콜럼비아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와 일본 음악을 출장녹음할 때 조선의 노래도 끼어들어 간 것이었다. 모두 30곡이었다. “한국음악 녹음의 시작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에디슨 스탠다드 유성기. 80만대 이상 팔린 에디슨의 대표작. 지성사 제공
유성기는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 수단으로 쓰였고, 보통학교의 입학자들을 모으는 데도 사용됐다. 어용단체 ‘국시유세단’이 일본 통치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 대중을 모으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는데, 민중은 야유와 돌팔매로 응답했다. 약장수들은 약을 파는 데 유성기를 활용했다. “그리하여 유성기는 점차로 대중성을 띠고 가두로 나서게 되어 매약 행상인의 선전도구로, 오입쟁이 풍류도구로, 남의 소실의 화초도구로 퍼지게 되었으며, 시골 농촌민이 5일에 1차씩 개최되는 장날에 아모 할 일 없이 다만 유성기 소리 들으러 가는 현상도 나타난 것이다.”(<동아일보> 1935년 7월11일)
1905년 일본 삼광당에서 판매하던 유성기 카탈로그. 지성사 제공
유성기음반의 생산과 판매는 일본 회사들 몫이었다. 유성기 가격은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대략 30~40원, 거실 거치용이 50~60원 정도였다. 평양 갑부였던 소설가 김동인은 225원이나 하는 최고급 유성기를 소유했다. “그의 음악적 취미와 관심은 ‘광염소나타’나 ‘배따라기’ 같은 문학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유성기음반은 구전에만 의지하던 전통음악을 기록으로 남겨, 명창들의 소리를 반복해서 들을 수 있게 했다. 음반이 판소리 등 전통음악을 변모시키기도 했다. 음반의 한 면에 길어야 3분 남짓한 소리가 담겼기 때문에 판소리는 농축되고 서정적인 표현이 강조됐다고 한다. 판소리는 남성 전유물이었는데, 극장이 생기고 ‘권번제’(기생조합제)가 도입되고 유성기음반이 인기를 끌면서 변화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남자 소리꾼은 몇 명에 그치고, 대부분 여성 소리꾼이 판소리를 취입했다. 유성기음반들에 판소리의 변화상이 담겨 있다.
서양 음악도 유성기음반을 통해 들어왔다. 서양이나 일본 노래의 곡조에 노랫말만 바꾼 창가가 유행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에 유학했던 조선인들이 창작한 유행가가 본격 등장했다. ‘낙화유수’ ‘황성의 적(跡)’(황성 옛터)이 대표적이다. 유성기음반은 1932~37년 절정기를 맞았다. “이 기간은 유행가 음반이 전통음악을 압도함으로써 우리나라 음악 유통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시기이기도 하다.” 1932년 조선에서 판매된 음반이 200만매를 넘었고, 절반이 서울에서 팔렸다. 조선 음보가 40만매, 나머지 160만매는 일본이나 서양 음보였다. 1945년 해방 전까지 6500여종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유성기음반은 30회 정도만 음질이 유지된다고 한다. 쇠바늘의 강도가 세면 음반이 빨리 닳아 음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쇠바늘은 곡을 한 번 듣고 교체한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1930년대 중반에는 ‘에로와 그로’로 불리는 노골적인 성 묘사와 혐오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논란이 됐다. <매일신보>(1936년 5월12일)는 17살 여성이 약장수가 틀어놓은 유성기 소리를 듣다가 아버지한테 들킨 뒤 “사람이 많은 길가에서 음란한 소리를 듣고 있음이 잘한 짓이냐”라는 질책을 듣고는 마을 저수지에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일제는 1933년 ‘축음기 레코드 단속 규칙’을 만들어, 음반 제조·유통·소비를 단속했다. 단속의 명목은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인데,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음반들이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압수 곡은 ‘아리랑’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애상적인’ 노래를 길거리에서 듣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기도 했다.
“유성기음반으로 이 땅의 음악은 질과 양 모두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유성기음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근대 공연예술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배 소장이 아쉬워하는 대목은 유성기음반의 보존과 활용이다. 대부분 개인 연구자나 수집가가 음반을 수집해 왔다. 그는 “유성기음반의 수집과 활용을 위해 민간이 할 것은 다 했다. 이제 국가 차원에서 음향기록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