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제국에 대항하는 언어의 ‘게릴라전’

등록 2019-07-12 06:00수정 2019-07-12 19:54

국문학자 한기형 17년 검열연구 결실
식민지 검열의 논리와 상흔 기록
검열에 우회하고 대항했던 쓰기 전략
통속과 정통문학 교직시킨 염상섭 등 주목
식민지 문역-검열/이중출판시장/피식민자의 문장
한기형 지음/성균관대학교출판부·3만5000원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내 두 개의 팔을 나는 촉대燭臺세음으로 내 방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 같다 (…)”

‘오감도-시 제13호’에서 시인 이상은 자신의 분리된 팔로 방안을 장식하는 기이한 신체 분할을 묘사한다. 이 시를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읽으면 어떨까. 시 속 화자가 외부의 힘에 의해 떨어져나간 자신의 죽은 팔을 차갑게 응시하는 모습은, 검열의 면도칼에 잘려나간 자신의 글을 바라보는 조선의 작가들의 시선과 닮아 있지 않을까.

한기형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가 최근 내놓은 <식민지 문역>은 일본 식민지 시기 검열과, 그 검열이 한국인의 문장과 언어감각에 남긴 영향을 추적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한 교수는 2002년부터 시작해 식민지 시기 검열을 오래 연구해왔다. 5명의 동료 교수들과 검열학회를 만들어 수차례 학회를 열고, 사료를 담은 자료집을 내면서 얻은 연구 결과를 이 책에 담았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중복검열한 자료. 1932년 <심훈시가집> 검열원고.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중복검열한 자료. 1932년 <심훈시가집> 검열원고.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책의 제목에 담긴 ‘문역’(文域)은 법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을 말하는 ‘법역’이란 단어에서 한 교수가 착안한 용어다. 제국 일본의 영토 안이었지만 ‘내지’와 식민지에 적용되는 법적 기준이 달랐고 표현의 한계도 그만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별되는 글(文)의 영역(域)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용된 표현의 범위가 때와 상황에 따라 극히 가변적이었기에, 식민지 조선인들의 글에선 혼란스러움과 함께 의도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 도착이 발생했다. 이런 불일치를 식민지 문화의 미성숙으로 폄하하며 ‘한국의 근대소설 중에 세계에 내놓을 만한 대작이 없다’고 말하는 콤플렉스를 두고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콤플렉스의) 이면에는 식민지의 특수한 환경을 비식민지의 관점으로(심하게 말하면 제국의 관점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지식계의 식민성이란 오랜 관성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발화방식에 대한 새로운 분석방법이 고안된다면 그러한 현상은 재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국이 식민지 텍스트들에 행한 검열의 논리는 무엇이었고, 그 검열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의 문장을 생존시키려 한 조선 지식인들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식민지 검열은 한국인의 지적 활동과 문화 전반을 통제, 장악하기 위해 행해진 국가폭력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에 합법적으로 생산된 텍스트들엔 가해와 피해라는 이원론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했다.

검열로 삭제되어 내용이 사라져버린 채 제목만 남은 이승준의 ‘<신생활>의 창간에 임하여’(1922년 3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검열로 삭제되어 내용이 사라져버린 채 제목만 남은 이승준의 ‘<신생활>의 창간에 임하여’(1922년 3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1910년대 식민지 초기 무단통치 시기에 일본은 검열의 대상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를 봉쇄했다. 하지만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 내부에선 무단통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조선에서 잡지를 발행하던 다케우치 로쿠노스케는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을 실질적으로 동화시키자는 동화주의는 무단통치와 모순된다는 논리를 폈다. 이런 맥락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문화통치가 시행됐고, 1920년 <개벽>,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탄생했다.

식민지 검열 자체는 물론 삭제와 정간 등의 폭력적 조치로 나타났지만, 매체란 본질적으로 근대국가의 통치 도구였다는 점을 봐야 한다. 제국은 장기적으로 식민지인들을 정신적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매체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런 공간에서 조선의 언론인들은 당국자를 면담해 검열제도 철폐를 요구하기도 하고, 검열에 걸릴 표현을 피해 뛰어난 작품을 생산해내는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허용과 관용의 한계를 실험했던 6년간의 짧은 시기는 막을 내린다. 결국 일본은 1926년 가장 영향력 있는 월간지였던 <개벽>을 폐간시키며 문화정치를 포기하게 된다. 한 교수는 식민지 조선을 동화시키기 위한 기본 전제인 조선인 참정권과 자치권, 근대적 매체의 운영조차도 이뤄내지 못한 제국 일본은 “실제로는 매우 유약했을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식민지 지식인 쪽에서는 어떤 대응이 이뤄졌을까. 한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염상섭, 김유정, 심훈 등의 문학적 추이를 살핀다. 특히, 염상섭은 엘리트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식민지 현실을 전부 담지 못한 <만세전> 이후, 통속과 정통문학을 의도적으로 교직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염상섭은 <삼대>, <광분> 등에서 치정처럼 통속적인 전통소설의 서사문법과 인물형상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 받아들이고 이를 변주하면서 식민지 문학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삼대>에서 사회주의자인 장훈이 참혹한 고문 속에서 담담하게 죽음을 수용하는 장면을 숭고하게 연출한다. “독자들이 사회를 위해 몸바치는 자들의 삶을 공명하고, 마침내 그들의 생각까지도 받아들이게 되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당시 극심한 검열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가 “현세 이상의 어떤 것과 연계되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검열로 삭제당한 부분을 대신하는 기호들. 1921년 6월 <공제> 제8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검열로 삭제당한 부분을 대신하는 기호들. 1921년 6월 <공제> 제8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제공
한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그동안 식민지 시기 근대 문학 연구가 식민지 구조를 전제하지 않고 단순히 서구의 근대성 이론에 근거해서 진행된 면이 있었기에, 근대성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개척해보려고 시도했다”며 “앞으로 검열과 연동된 출판시장의 동학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1.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3.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4.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5.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