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파리 좌안 1940-50아녜스 푸아리에 지음, 노시내 옮김/마티·2만5000원
1939년 8월24일. 루브르 박물관장 자크 조자르는 박물관 문을 걸어 잠갔다. 공식적인 이유는 수리였으나, 진짜 이유는 ‘피난’이었다. 독일군 침입을 대비해 <모나리자>를 비롯한 세계적 미술품 4000여점을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려 했던 것이다. 작품들은 1862개 나무상자에 나눠 담겨 차량 203대로 운반됐다. 자가용, 택시, 화물차는 물론 구급차까지 투입됐다. ‘그림 대탈출’ 후 10개월 만에 독일군은 파리에 군홧발을 내디뎠지만 조자르의 발 빠른 대피 덕에 프랑스 외곽에서 안전하게 보존된 모나리자는 훗날 해방된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됐던 프랑스는 어떻게 문화적 위상을 회복했을까.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은 이 질문에서 시작한 책이다. 저자 아녜스 푸아리에는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온갖 기록물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400여쪽의 세밀화를 독자에게 내민다. 주권을 빼앗긴 집단적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문화예술이 이토록 찬란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비밀을 찾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장 폴 사르트르(왼쪽)와 시몬 드 보부아르. 사진 데이비드 셔먼, <더 라이프> 사진 콜렉션. 마티 제공
힌트는 ‘파리 좌안(左岸)’에 있다.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우안(右岸)과는 달리 좌안은 지성인의 무대였다.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알베르토 자코메티, 파블로 피카소 등 문화예술인이 이 무대 위에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주연은 단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다. 고교 철학교사로 일했던 둘은 집이 아닌 파리 좌안의 허름한 호텔과 어두침침한 카페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문학을 논했다. 프랑스의 국운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고, 사르트르가 독일 포로로 잡혔다가 석방된 이후 책에서 눈을 떼고 점차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둘은 레지스탕스 단체 ‘사회주의와 자유’를 결성했고, 프랑스 봉기 성공 이후인 1945년에는 <레 탕 모데른>(현대)이라는 문예지를 창간했다. 형식은 문예지였으나 내용은 저널리즘과 잘 구분되지 않았다. 언론은 이 시도를 ‘뉴저널리즘’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창간호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박자를 놓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우리의 의도다. 우리는 주저 없이 어느 한쪽 편을 들 것이다”라고 썼다.
동시에 두 사람이 연이어 내놓은 소설이 ‘선택과 책임’을 다루면서 ‘실존주의’가 파리의 새 키워드로 등극한다. 사르트르의 강연에서 청중 두 명이 실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르트르는 아이돌급 인기를 얻고, 보부아르와의 ‘다자연애’도 당대의 힙(hip)이 된다.
독일 점령기 파리의 문화를 지킨 이는 프랑스 문화예술인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문학 검열을 위해 파리에 파견됐으나 히틀러보다 문학을 더 사랑한 독일 장교 게르하르트 헬러, 독일인의 탐욕으로부터 프랑스 예술을 지키려 조자르와 암묵적 동맹을 맺은 프란츠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의 얘기도 흥미롭다. 파리 여행을 앞둔 이들에게 권한다. 에펠탑과 개선문 등지에 한정됐던 파리의 관광 지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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