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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복지한국, 과거를 모르면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등록 2019-06-28 06:01수정 2019-06-28 20:14

18세기부터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
정치·경제·사회 총체적으로 서술
“대기업 중심 산업 구조 벗어나야
이행기 인내해줄 정치세력 필요해”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 2, 3
윤홍식 지음/사회평론아카데미·1, 3권 2만9000원 2권 2만5000원

시작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사회복지 전문가인 윤홍식 교수에게 2012년은 매우 바쁜 해였다. 그해 12월에 있을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그는 ‘왜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그해 11월 한 달 동안 30회 강연을 소화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이 강연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죄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웨덴, 독일, 영국이 어떻게 복지국가가 되었는지는 속속들이 잘 알았지만, 막상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낀 그는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13년부터 한국 복지국가 역사 연구에 파묻혔다. 연구년이나 방학 때면 하루에 14시간씩 연구에 몰두했다. 마침 박근혜 정부 집권기인 2013년부터 2017년까지는 그를 찾는 곳도 없었다. 그렇게 7년간 연구한 결과물이 전체 1800쪽에 이르는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전 3권)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복지국가에 대한 수많은 저서 중에 이 책 만한 역작은 아직 없었다고 단언한다.”(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 “한국 사회과학계에 기념비적인 책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 “학계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다”(문진영 서강대 교수) 아무리 추천사라지만, 대체 어떤 책이길래 이런 정도로 찬사가 쏟아진 것일까?

한국의 복지 역사를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이란 3권의 책으로 정리한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국의 복지 역사를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이란 3권의 책으로 정리한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윤홍식 인하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이전까지 한국의 복지정책 역사를 다룬 책과 이 책의 차이점을 ‘총체성’이라 설명했다. “이전에 나온 책들은 복지 제도의 변화만을 중심으로 쓴 책이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도 외국의 복지체제를 다룰 때는 경제 체제와 산업 구조 변화, 권력자원 등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그처럼 정치와 경제, 사회를 통합해서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를 정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한국사회가 걸어온 복지체계의 경로를 알아야 그를 기반으로 한국에 맞는 복지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윤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19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서구자본주의와 제조업과 노동조합이 황금기였던 서유럽에서 형성된 분배체계를 ‘복지국가’라고 부른다. 이처럼 복지국가가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라면, 그걸 그대로 한국에 들여올 수 없지 않나. 한국이 그동안 만들어온 분배체계의 유산이 무엇인지 해명해야만 그에 착근해서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어갈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셋으로 나눠 18세기부터 일본 강점기인 1945년까지를 자본주의로의 이행기(1권), 1945년부터 1980년까지를 반공개발국가 복지체제(2권), 1980년부터 2016년까지를 신자유주의 시기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편(3권)이라는 주제로 다뤘다.

그는 이 책에서 1961년부터 1997년까지를 ‘개발국가 복지체계’라고 정의했다. 경제성장이 일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얻은 소득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고 불평등이 완화됐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런 분배체계가 더는 작동하지 않기 시작했다. 곧이어 터진 1997년 아이엠에프(IMF) 사태는 개발국가 복지체계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직후에 들어선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의 중심은 서구 복지국가의 근간이기도 했던 사회보험의 확대였다. 문제는 가입자들이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기여금으로 운영되는 사회보험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는 데 있었다.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노동시장 분화로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영세자영업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사회보험 중심 복지체계 때문에 가장 공적 지원이 필요한 이들 불안정 노동자들이 오히려 공적 사회보장제도에서 소외되는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현상을 “역진적 선별주의”라고 불렀다. “보통 복지라고 하면 저소득층 지원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한국 복지의 70~80%는 사회보험을 통해 이뤄진다. 20~30%만이 취약계층 복지나 보편적 복지다. ”

문제는 사회보험 제도 하나를 고쳐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산업 구조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맞춰 성장해 좋은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도록 산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기존의 재벌·대기업·수출 중심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수십년간 걸어온 경로를 벗어나려고 할 때는 일정 기간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인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를 버텨낼 정치적 기반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선 복지국가로 변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라는 것이 윤 교수의 걱정이다.

“문재인 정부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제 지표가 악화되면서 다시 재벌에 손을 내밀고 있다. 남은 정치적 세력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정도인데, 지금 문 정부 아래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된 상태다. 물론 민주노총이 요즘 정서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개혁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민주노총에 너무 쉽게 선을 긋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양대 노총을 배제하고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향해 나아가기가 굉장히 어렵다. 촛불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민주노총이 실무적으로 지원하면서도 조직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의 조합원의 30%가 비정규직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싸워온 집단은 민주노총이 거의 유일하다.”

윤 교수가 지금 국회에서 추진하는 선거제 개혁이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매우 중요한 길목이라고 보는 이유도 정치와 복지의 깊은 연관성 때문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다당제가 구축되고,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이 쉬워진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큰 진전을 이루는 것이다. 민주당이 의석수에서 피해를 볼 것임에도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론도 시민사회도 민주당이 선거제 개혁을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문 정부가 노력은 하고 있지만,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보다 부족하다. 시장 소득과 가처분 소득의 차이를 보면 정부의 개입 정도를 볼 수 있는데, 유럽국가들은 그 차이가 크지만 한국은 적은 상태다. 정부의 개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당분간 한국의 복지정책은 혼종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말한다. 취약계층 보호를 확대하는 자유주의적 방식과 조세를 강화해 사회보험의 보편성을 확대하는 사민주의적 방식의 복지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임금소득에 대해서만 과세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말대로, 금융과 임대소득 등 비임금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서 사회보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가 정치와 경제, 사회를 넘나드는 폭넓은 연구를 하며 느꼈던 아쉬움은 거시적 시각의 경제사 연구의 맥이 끊겼다는 것이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영향으로 90년대 중반까지는 거시적으로 한국 경제사를 총괄해서 보는 저서와 논문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거시적 담론은 불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서 인지 논의의 맥이 끊어지게 됐다. 직접 개별 저서들을 읽고 종합적으로 재해석해내는 작업이 힘들었다. 경제사학계에서 한국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연구가 복원됐으면 좋겠다.”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은 이 세권으로 끝이 아니다. 10~20년 뒤에 2016년 이후의 복지국가의 궤적을 정리하는 책과 북한 복지체계의 역사를 정리하는 책, 이 두 권을 더 쓰겠다는 것이 그의 장기 계획이다. “통일이 되면 평양에 체류하면서 북한 분배체계의 역사를 써서 한반도 전체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을 완성하는 게 내가 가진 꿈이다. 통일이 진행되면 복지체계의 문제가 커다란 폭풍을 불러올 텐데 이를 위해선 북한 복지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저서가 그의 연구 업적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 물었다. “한국 학계가 너무 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가 승진이나 승급 심사를 받을 때 저술은 전혀 반영이 안 되고 논문만 반영된다.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던 것도 정교수로 정년 보장이 됐기 때문이다. 조교수가 이런 작업을 하는 건 무모한 짓이다. 40대 절정기에 이런 힘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지금 교수 평가 시스템에선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어떤 독일학자가 한국학자를 ‘에이포 텐’(A4 10장 짜리 논문만 쓰는 교수)이라고 했겠나. 3~4년 논문을 안 써도 그동안 유의미한 책을 냈다면 똑같이 평가해주는 제도가 생기면 좋겠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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