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에움길-폴 리쾨르의 해석학과 문학김한식 지음/문학과지성사·3만4000원
라캉, 푸코, 데리다…. 세계 지성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폴 리쾨르(1913~2005)라는 이름은 아마도 낯설 것이다. 그런 낯섦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리쾨르의 철학을 처음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은 체계나 일관성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성철학, 현상학, 해석학, 정신분석학, 신학, 문학, 역사를 비롯해 인문과학 전반을 아우르는 수많은 사상을 논하는 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그리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정으로 그에게는 ‘독창적 개념이 없다’, ‘절충주의자다’, ‘니체나 데리다 같은 해체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한다’, ‘사르트르나 알튀세르의 현실 변혁의 열정이 안 보인다’는 등의 비판이 따라다녔다.
김한식 중앙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가 새로 출간한 <해석의 에움길>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리쾨르의 저작 전반을 섭렵해 사상의 전체 윤곽을 성공적으로 그려 보여준다. 이는 그가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전 3권)를 번역하는 등 일찍부터 리쾨르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소개해온 연구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폴 리쾨르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소르본대학, 낭테르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지내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해석학적 사유를 펼친 사상가다. 한겨레 자료 사진
리쾨르는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로 이어져 내려오는 계보를 잇는 해석학의 대가로 꼽힌다. 애초 해석학은 고대와 중세 서양에서 성서와 고전문헌의 텍스트가 모호하거나 모순이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로서 성격이 강했다. 19세기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낭만주의 해석학에 이르러 해석학은 인문과학이 과학으로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어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해석학을 인간의 세계 경험과 세계 자체의 언어적 특성을 해명해주는 보편철학으로 발돋움시킨다.
20세기 해석학자로서 리쾨르가 중요하게 생각한 과제는 ‘의심의 해석학’과 ‘신뢰의 해석학’의 대립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였다. 그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의심의 대가’라고 불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아의식을 ‘환상’이라고 봤다. 이들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의식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아는 것들이 사실은 허위 의식이거나, 힘에의 의지, 또는 무의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심의 대가’들의 탈신비적 해석은 의식을 자유롭게 해방했지만, 동시에 현상학을 비롯한 서양 현대철학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었다.
리쾨르의 기획은 데카르트적인 투명하고 자신만만한 코기토(주체)가 아니라 ‘상처 입은 코기토’ 개념을 내세움으로써 주체 개념을 되살리려 하는 데 있다. 의심의 해석학에 의해 모욕당하고 상처 입은 코기토가 사유의 근본적인 토대가 될 수는 없지만, 코기토가 없이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능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그가 ‘신뢰의 해석학’이라고 구분한 장 나베르의 반성철학, 후설의 현상학, 딜타이와 가다머로 이어지는 해석학의 도움을 받아 가능하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반성철학의 전통에 있다고 밝히지만, 그 반성철학은 데카르트부터 칸트를 거쳐 이어져온 투명한 자기의식을 전제로 하는 반성철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 이래 반성철학은 자기와 자기 자신(의 의식)과의 완전한 일치를 가정하고, 다른 어떤 실증적 지식보다 자기의식을 의심할 수 없는 지식으로 삼는다.
하지만 “리쾨르가 말하는 반성은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상징의 매개를 거친 반성 또는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 소리 없는 ‘부름’에 가깝다.” 즉, 그는 의식을 투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풀어야 할 과제로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텍스트의 매개를 거친 자기 이해, 타자의 타자성이라는 매개를 거쳐 에둘러 돌아가는 코기토로서의 자기라는 명제는 다른 해석학 전통과 리쾨르의 해석학을 구별하게 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처럼 리쾨르 해석학의 과제는 기호와 상징, 텍스트라는 매개를 거친 자기 이해를 통해 상처 입은 코기토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리쾨르 사상 초기에는 겹뜻을 지닌 상징과 신화가, 정신분석과 구조주의의 도전을 거치면서 언어적 전회를 이룬 후에는 은유와 이야기라는 문학 담론이 그러한 매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보편철학으로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이처럼 선험적 주체에 토대를 둔 칸트의 인식론이나 하이데거의 직접 이해의 존재론을 넘어 기호의 체득이라는 에움길을 거친 자기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한 존재론적 전환, 실천적 전환을 추구한다. 자기 이해의 목적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리쾨르의 사유 방식은 서로 각을 이루는 사유들 사이의 긴장을 부각하고 모순되는 것들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충돌시킴으로써 그 유효성과 한계를 드러낸 뒤에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산파술에 가깝다. 김 교수는 이를 ‘화쟁’의 방법론이라 부른다. 이런 리쾨르의 해석학적 성찰은 구조주의가 쇠퇴하고 윤리학에 대한 요구가 커져가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1970년대 미국과 1990년대 이후 프랑스의 지성계에서 뒤늦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각자 자신의 신념만을 강화해 나가는 확증 편향의 시대에 리쾨르의 해석학적 태도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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