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이진우 지음/휴머니스트·1만5000원
독일 하노버의 생가에 벽화로 그려진 한나 아렌트의 초상화. “어느 누구도 복종할 권리는 없다”는 생전의 발언이 새겨져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는 시민에게 정치적 자유는 없다!”
철학자 이진우 교수가 쓴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에 달린 부제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철학자 아렌트(1906~1975)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한 고갱이라 할 만하다. 유대인 학살을 충실히 수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1961)을 지켜보며, 아렌트는 ‘생각 없음’의 비극을 갈파했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이다.
니체 철학을 천착하고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등 아렌트의 초기 저작을 번역한 이진우는 이번 저술에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제기되는 열 가지 정치철학적 질문을 아렌트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아렌트의 여러 저작에서 중요한 문장들을 추려 사유와 비판의 실마리로 삼았다. 아렌트의 사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이자 나침반 같다.
질문들은 오늘날 정치, 공동체, 사회적 관계, 나아가 시민 개개인의 실존적 자유와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까지 현실과 맞닿는다. 이제 전체주의는 끝났는가? 괴물 같은 악을 저지른 자는 왜 괴물이 아닌가? 왜 완전히 사적인 사람은 자유가 없는가? 정치는 왜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는가? 지배 관계를 넘어선 평등의 정치는 가능한가?
예컨대, 2016~17년 촛불혁명을 불러온 것은 절대권력을 가진 독재자의 폭정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가의 시스템을 망가뜨린 외눈박이 보수 정권의 멍청함(…), 그 어리석음으로 정권을 사유화하고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어놓은(…) 정치가 사라지고 통치만 있는 위기”였다. 지은이는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악의 평범성’에 주목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두고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돼 있(으며…),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은데,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말과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악’은 사고를 허용하지 않으며 텅 비어 있을 뿐, 절대악 같은 건 없다는 이야기다.
2017년 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탄핵과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의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아이히만은 법정 변론에서, “나는 일생을 (철학자) 칸트의 ‘복종의 의무’ 원칙에 기대어 살아왔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말한 복종의 의무는 세속의 법과 권력이 아니라 이성의 정언명령과 스스로 세운 도덕법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 순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능력과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만큼, 아이히만의 주장은 터무니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폴리스)과 사적 영역(가정)을 엄격히 구별한 고대 그리스에 주목했다. “폴리스는 자유와 평등의 장소”이며, 공익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의 공간이다. “우리는 공론 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누군가가 된다.” 스스로 사유할 권리를 포기하거나 박탈당할 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는 파편화되고 고립된 ‘대중’으로 전락한다. 전체주의가 발흥하는 토양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의 성실함은 칸트가 말한 ‘노예의 도덕’에 다름아니다.
아렌트의 이런 사유는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 <시민 불복종> 같은 저작으로 확장된다. 지은이는 “아렌트는 평등한 사람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비지배’의 정치 형태를 꿈꾼다”고 강조한다. “대의민주주의는 피치자가 통치자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 뿐, 시민들이 공적 문제의 참여자가 된다는 걸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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