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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70년 ‘4·3의 한’ 품고 살아온 저항의 세월이었다”

등록 2019-06-05 23:23수정 2019-06-06 00:02

[짬] ‘제주포럼’ 기조강연 재일동포 김시종 시인

‘제주 4·3’ 때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지 70년을 맞은 재일동포 김시종 시인. 사진 허오준 기자
‘제주 4·3’ 때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지 70년을 맞은 재일동포 김시종 시인. 사진 허오준 기자
“저의 ‘재일’(在日) 생활은 유려하고 교묘한 일본어에 등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정감 과다한 일본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저를 키워낸 일본어에 대한 나의 보복으로 삼아 문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2월 심부전증으로 입원한 뒤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노 시인의 눈빛만큼은 강렬했고, 언어는 청중들의 숨을 죽이게 했다. 지난달 31일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4회 제주포럼’의 ‘4·3과 경계’ 세션에서 ‘경계는 내부와 외부의 대명사’라는 기조강연을 한 재일동포 원로시인 김시종(90) 선생을 만났다.

부산 출신 어머니 고향 제주에서 ‘해방’
항쟁 발단 ‘1947년 3·1 발포’에 궐기
죽음 피해 1949년 6월 일본으로 밀항
“참혹한 주검들 썩은내 잊을 수 없어”

코리아국제학원 통해 ‘월경인’ 양성
16일 오사카대 ‘탄생 90돌’ 기념 심포

부산에서 태어나 스무살 때인 1949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올해 ‘재일 70년’을 맞은 김 시인은 그 세월을 ‘저항의 70년’이라고 했다. 오사카를 거쳐 나라현 이코마시에 살고 있는 그는 시집 <지평선> <이카이노 시집> <광주시편> <자이니치의 틈새에서> <잃어버린 계절> 등을 펴내 마이니치출판문화상, 다카미 준상, 오사라기 지로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문학세계는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김시종 시인 연구자’ 호소미 카즈유키 일본 교토대 교수는 김 시인의 표현을 ‘세계문학’으로 본다고 평했다. “김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어를 생활언어로 삼고 있는 재일동포, 특히 젊은 세대를 위해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어를 통한 일본어에 대한 ‘보복’이 김 선생의 평생의 과제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과 북, 어디에서도 속하지 않고 살아온 김 시인은 ‘경계인’이면서 끊임없이 경계를 넘는다.

“바란 바도 없는 청천벽력의 ‘해방’에 마주쳐서 감성의 원천이자 소중한 언어인 일본어로부터 처참하게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저는 일제의 굴레에서 70여 년 전에 해방됐지만,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일본어까지 결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일본어를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어는 검증되어야만 하는 제 존재 증명의 눈금이 되기도 합니다.”

김 시인이 주도해 10여년 전 건립한 코리아국제학원도 이른바 ‘월경인’의 육성을 건학 정신으로 삼고 있다. 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오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전부가 버티고 선 벽의 경계다. 인종 차별이나 지역 차별, 장애인과 여성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그 대부분이 개개인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고 스스로가 쌓아 올린 벽으로 경계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오늘을 만든 것은 ‘제주 4·3’이다. 4·3항쟁에 직접 연루돼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4·3에서의 경계라면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해안마을에 돌담을 둘러 외부와 차단한 것도 경계이고, 해안선에서 5㎞ 이상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분류한 것도 해안의 경계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4·3 희생자라고 할 때 ‘희생자’라는 표현에는 ‘숭고한 죽음’ 같은 심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4·3으로 인한 죽음의 실상은 숭고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는 공포와 눈을 부릅뜨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없는 무념, 버려지거나 방치된 주검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죽어서 방치된 사람처럼 추악한 것이 없습니다. 파묻으려고 던져버린 80구 넘는 주검을 내 눈으로 봤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썩은 주검에 손을 대면 냄새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가 숭고한 심정을 이야기하는데 희생자의 추함과 분노, 참을 수 없는 죽음이 눈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김 시인은 4·3세션이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통해 ‘죄악감’을 언급했다. “4·3의 참혹한 사태를 일으킨 한 사람이라는 죄악감이 마음 속 깊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하면 제주를 가까이하고, 제주가 내 마음 속에 다시 살아날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4·3에 대한 오해를 사기 쉬운 얘기지만’이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4·3 무장봉기는) 시대적, 민족적 정당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분단이 눈 앞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으며, 민간인 6명이 숨진 1947년 3·1 발포 사건을 참지 못해서 궐기했지만, 그에 대한 참담한 결과로 죄악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4·3은 제주만의 특별한 참극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의 직접 관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될 사실이다. 냉전이 시작되는 첫 사건이 4·3이다”고 덧붙였다.

제주가 고향인 김 시인의 어머니 기일도 4월3일이다. “어떻게 어머니 제삿날까지 같은 날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4·3은 70년이나 지났지만 지난 일이 아닙니다. ‘재일’의 나는 여전히 4·3을 품고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사람입니다.”

김 시인은 지난해부터 일본 후지와라서점에서 <김시종 컬렉션> 12권을 펴내고 있다. 오는 16일에는 오사카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월경문화연구 이니셔티브 주최로 김 시인 탄생 90돌과 재일 70년을 기념하는 ‘월경하는 언어’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생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심포지엄을 여는 것은 이례적이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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