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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등록 2019-05-31 06:00수정 2019-05-31 19:51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베트남과 전쟁의 기억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부희령 옮김/더봄·2만2000원

기억은 중요한 전투 자원이다. 앞선 전쟁의 기억이 이어져 다음 전쟁의 조짐이 되기도 하고, 국가는 과거 전쟁 기억을 활용해 국민을 새로운 전쟁에 동원한다. 국가가 전쟁과 관련된 기억을 필사적으로 독점하려 하고, 다른 국가의 기억과는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고, 두 번째로는 기억 속에서 싸워야 한다”는 지은이의 말은 이 점을 함축한 아포리즘이다.

소설 <동조자>(민음사)로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비엣 타인 응우옌 서던캘리포니아대학 교수는 1971년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반공 진영이었던 부모를 따라 보트 피플이 되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급격히 바뀐 그에게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는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10여년에 걸쳐 베트남, 미국, 한국, 캄보디아 등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이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를 묻는다. 이 결과물이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에 오롯이 담겼다.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시) 인근에 있는 베트남공화국 국립묘지에 있는 남베트남 병사들의 묘비 중에선 얼굴 사진이 훼손된 것이 적지 않다. 사회주의 정권인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남베트남 정권의 군사들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봄 제공
베트남 사이공(호치민시) 인근에 있는 베트남공화국 국립묘지에 있는 남베트남 병사들의 묘비 중에선 얼굴 사진이 훼손된 것이 적지 않다. 사회주의 정권인 북베트남이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남베트남 정권의 군사들은 추모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봄 제공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이라 불리지만, 그 이름은 이 전쟁의 실상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이 전쟁은 베트남에서만 일어났는가? 전쟁 당시 캄보디아에선 70만명, 라오스에선 40만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인과 미국인들 모두 인정도 기억도 하지 않으려 한다. 전쟁 당시에 북베트남에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경유해 군대와 군수물자를 보내자, 미국이 폭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뒤이어 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 정권이 일으킨 200만명 학살은 전쟁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베트남 하노이 전쟁역사박물관에 설치된 파괴된 전투기 더미. 전투기 잔해 앞에는 라이플 소총을 등에 맨 젊은 여성 군인이 미군 전투기 표지를 줄에 매달아 끌고 가는 흑백 사진이 놓여 있다. 베트남인들은 비행기로 폭격을 퍼붓는 ‘상공의 해적들’을 증오했다. 더봄 제공
베트남 하노이 전쟁역사박물관에 설치된 파괴된 전투기 더미. 전투기 잔해 앞에는 라이플 소총을 등에 맨 젊은 여성 군인이 미군 전투기 표지를 줄에 매달아 끌고 가는 흑백 사진이 놓여 있다. 베트남인들은 비행기로 폭격을 퍼붓는 ‘상공의 해적들’을 증오했다. 더봄 제공
응우옌은 “제한된 정체성을 지닌 시민이 오직 자신의 가족, 부족, 그리고 국가에만 적용되는 편협한 기억만을 고수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자기 것만을 고수하는 그들의 기억 윤리는 전쟁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2진법 부호이다. 쉽게 세상을 우리 편과 반대편 그리고 선과 악으로 나누어, 동맹을 구축하고 적을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국내 독자들은 그가 어떻게 한국을 바라볼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 책 5장 전체가 한국을 다룬다. 응우옌은 책 전체에서 “공정하게 기억하려는 윤리적 실천에 예술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면서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예술 작품을 꼼꼼히 살펴본다. 먼저 그는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1989), 안정효의 소설 <하얀 전쟁>(1989)을 읽으며, 이 소설들이 한국과 미국 정부가 원하는 기억에 대항하려는 “주목할 만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진 <하얀 전쟁>(1994)부터 <님은 먼 곳에>(2008), <국제시장>(2014) 등 현재로 올수록 “서사의 어두운 면은 줄어들고 과거를 수정하려는 노력은 늘어나고 있음이 명료하게 보인다.” 이런 흐름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변화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한국군의 학살과 만행은 점점 잊히고 한류 문화인 케이팝, 드라마, 영화가 들어오면서 “기억을 세탁”하기 시작한다. 한국인들은 문화의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비인간적 행위를 기억에서 지우고 피해자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한다는 것이 응우옌의 지적이다.

베트남 비무장지대 근처 독 미에우 중포기지의 녹슨 탱크. 더봄 제공
베트남 비무장지대 근처 독 미에우 중포기지의 녹슨 탱크. 더봄 제공
책을 읽을수록, 지은이가 문학과 철학으로부터 끌어오는 풍부한 자원과 넓고 깊은 성찰에 놀라게 된다. 베트남 전쟁을 알고 말하려는 사람의 필독서로 꼽힐 만한 책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비엣 타인 응우옌. 더봄 제공
비엣 타인 응우옌. 더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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